이날 술시에 금잔고지 망군 경상 우수영 수군(慶尙右水營水軍) 허수광(許水光)이 들어와 고하는 말이 이러하다.
김해 금단고지 연대에 망을 보러 올라 가는 길에 봉밑에 작은 암자에 사는 늙은 중을 데리고 올라 갔다. 연대(연기를 피워서 군호하는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김해로 빠지는 두 강 깊은 목에 여기저기 정박한 적선이 백여 척이나 되는데. 노승의 말을 듣건댄 근래 매일 한 오십여 척씩이나 적선이 몰려 오기를 연해 열 하루 동안이나 하였는데 어제 안골포에서 접전하는 포성을 듣고는 간밤에 거의 다 도망하여 달아나고 백여 척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부하 제장은 강에 정박한 적선을 소탕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순신은 강 속에 숨은 적을 토벌하기는 불가능 하다고 하여 천성보(天城堡)로 불러 왔다가 그 밤으로 회군하겨 십 이일 사이에 한산도(閑山島)로 돌아 왔다.
한산도의 팔일 싸움에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던 적병들이 여러 날 굶은 끝에 몸을 기동할 수가 없어서 강변에서 조는 이도 있었다. 나머지 사백여 적병도 농중에 든 새라도망할 길이 없을 것이라 하여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한산도르 지켜 적이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순신은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와 함께 군사를 끌고 본영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렇게 양산(梁山)과 부산(釜山)의 적을 그냥 두고 회군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산도와 안골포 싸움에 예기를 질리운 적의 수군의 협력이 없이 수군만 가지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음이요.
둘째는. 많은 군사가 여러 날 싸움에 군량이 진하여 전라도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두 무인지경인 경상도 연해에서 군량을 얻을 길이 없음이요.
셋째는. 금산(錦山)을 점령한 적세가 치장하여 전주(全州)를 범하였다는 경보가 왔으니 잘못하면 전라도 전토가 적의 손에 들어 가 그야말로 조선군이 근거를 잃어버릴 근시이 있음이었다. 만일 전라도마저 적의 손에 들어 가면 순신의 수군까지도 양식을 얻을 발을 붙일 근거를 잃어 버려 조선은 영영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 )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는 것은 순신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구절이다.
이리하여 순신은 전군을 끌고 한산도를 떠나 본영인 전라도 좌수영으로 향하였다. 돌아 오는 길에 순신은 이번 싸움에 사로잡은 우리 사람 몇을 심문하였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 운(鄭運)이 사로잡은 거제도 오양개(巨濟島烏陽개) 포작 최 필(崔弼)을 불러 그는 말하되. 적병에게 잡힌 지도 얼마 안되고 또 말도 몰라서 적병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노라 하며. 다만 전라도로 간다는 말만 알아 들었는데 그 눈치를 보면 전라도로 간다는 말만 알아 들었는데 그 눈치를 보면 전라도로 가려고 견 내 도에 머물렀다가 페한 모양이라고 할 뿐이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이 사로잡은 사라은 서울 중접보인(中接保人) 김덕종(金德宗)이라고 하는데. 그는 말하기를. 유월 산에 서울에 웅거하던 적병의 수효는 알 수 없으나 네 패에 나뉘어서 내려 올 때에 자기도 가족을 데리고 끌려 왔다고 하며. 서울서 내려 온네 패 중에 두 패는 부산 해변에 진을 치고.
한 패는 양산강에 진을 치고 또 한패는 전라도로 간 줄은 아나 말을 몰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하며. 또 한 패는 서울에 유진하고 사방에 방을 붙여 피난한 백성을 불러 들여 지금은 하나 남기고 다 들어 왔다 하며. 자기를 데리고 서울서 내려 온 장수는 이번 싸움에 죽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