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십 오일 석양에 . 일본군은 왕성탄으로 건너기 시작하였다. 새벽에 습격했던 조선 군사들이 건너는 것을 보고 길을 찾은 것이었다.
왕성탄을 지키던 군사를 향하여 활 한 방 쏘아 보라는 말도 아니하고 말을 타고 평양 성중으로 달아나 버리고. 이것을 본 군사들도 활을 메고 이 윤덕의 뒤를 따라 성중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성중에 들어 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성중에는 아직도 많은 군사와 대관들이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왕성탄을 지키되 힘을 다한다고 하던 순찰사 이원익은 밤중에 김명원의 밀서를 보고 이 윤덕과 군사들에게 대해서는 군사와 군기를 가지러 간다고 일컫고 성내로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이 윤덕은 윤 두수. 류 성룡. 김명원. 이 원익 들을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군사들도 다 내버리고 왕의 뒤를 따라서 달아나 버렸다.
이 윤덕을 따라 성중에 들어 왔던 군사들도 저마다 대관들과 대장들을 욕하고.
『이놈들을 배때기 째지 못한 것이 분하다.』
하고 도망해 버렸다.
일본 군사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아니하고 강을 건넜다. 그러나 여울 지키던 군사들이 활 한 방도 쏘지 아니하고 성중으로 들어 가는 것이 필시 꾀가 있음이라하여 곧 성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부벽루 영명사(永明寺) 근방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을 말대로 기어 올라갔던 척후의 보고를 듣고야 평양 성중이 텅 빈 것을 알고 대군이 일제히 성중에 들어 왔다.
이 모양으로 그 굳은 평양성까지도 적군에게 내어 주었다. 임 욱경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싸워 보지도 못하고.
평양을 떠난 왕은 처음에는 영변(零邊)으로 갔다가 다시 박천(博川)으로. 왕이 의주에 도달하시었을 때에는 의주 성중은 무인지경이었다. 의주 목사는 달아나고 백성들은 피난하여 버리고 새와 닭. 개. 짐승의 그림자도 없고 남아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나. 늙은이. 홀아비 같은 사람뿐이었다.
왕은 이유증(李幼證)으로 의 주 목사를 삼고 따라 온 조신 십여 인을 거느리고 동헌으로 행궁을 삼았다. 왕은 의주에 이르러 동으로 서울 있는 곳을 향하여 통곡하고 글한 수를 지어 중신에게 보였다 -.
『 』
(나라 일 창황한 제 충신이 그 누구냐. 큰 뜻 두고 나라 더나 회복은 너희 믿네 관산 달에 통곡하니 . 압수바람 마음 아파라. 조신아 이 후에도 동야서야 다시 할다!) 동야서야라 함은 이렇게 당파 쌈으로 나라를 망쳐 고도 동인이니 서인이니 다시 하겠느냐 하는 뜻이다. 나와서 가산(嘉山). 정주(定州)를 지나 유월 이십 이일에 의주(義州)에 도달하였다.
평양성을 점령한 소서행장(小西行長)등은 수십 명의 조선 사람을 매수하여 위주에 이르기까지 각처에 염탐군을 늘어 놓아 밤낮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소서행장은 연광정에 가만히 앉아서도 평안도 각읍의 사정을 빤하게 꿰어 들고 앉았다.
소서행장이 의주까지 들이치지 아니하고 평양에 지체한 것은 제이차로 일본에서 건너 온 해군이 이 순신(李舜臣)의 해군을 싸워 이기고 경상. 전라.
충청도의 바다를 완전히 손에 넣어 수륙이 서로 응할 수 있는 날의 기다리는 까닭이었다. 부산서 의주. 육로 이천리의 전선을 해상권을 손에 넣지 않고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