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삼도순찰사의 오만 대병이 적병 사오 인의 칼에 흩어진데 들뜬 비위를 잠깐만 참고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부원수 신각(申恪)에 관한 우습고 슬픈 이야기를 하나 더 듣자.
애초에 도원수 김명원(金名元)이 한강을 지킬 때에 부원수 신각(申恪)의 의견은. 「우리 군사가 오합지중이 되어서 싸움을 당하게 되면 도망하기가 쉬우니. 차라리 전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서 배수진을 치자. 그러하면 뒤로 도망할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적과 사생을 결할 것이요. 그리하면 적병은 천리 행구에 피곤한 군사요. 우리는 잘 자고 잘 먹은 군사일뿐더러. 우리편은 먼저 험한 곳을 잡아 진을 치고 있을 것인즉 아직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새로 서투른 지방에 오는 객군인 적병을 싸워 이기는 것은 심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한강을 앞에 두고 이쪽에서 적을 막으려 하면. 젖병은 한강 저편에 자리를 잡고 몇 날이든지 군사를 쉬이며 우리 형세를 염탐할 것이요. 또 그동안에 강을 건널 꾀를 할 것이니. 이왕 군국을 위하여 한번 싸우는 바이면 강을 건너 가 배수진으로 자웅을 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명원은 이런 위험한(제 목숨이)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신 각의 의견을 좇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김명원이 다른 군사보다도 먼저 적병이 강을 건너오기도 전에 강 저쪽에 있는 적병을 보기만 하고 뺑소니를 하는 양을 보고는 신각은 김명원을 버리고 서울로 유도대장 이 양원(李陽元)을 찾았다.
이제 이 양원의 군사나 가지고 한번 싸워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양원도 김명원과 다름이 없는 위인이었다. 도원수 김명원은 강 저쪽에 있는 적병의 빛이라도 보고 달아났지마는 유도 대장 이 양원은 적병이 온다는 소리만 듣고 벌써 처첩을 끌고 동소문으로 빠져 나갔다. 그들의 생각에 피난처는 동소문 밖에 있는 줄 아는 것이 유행이었다. 강원도. 함경도를 안전 지대로 알았던 것이다. 고관대작의 처첩 자녀들은 물게뭉게 동소문을 나간 것이다. 이 양원이 그리로 나가지 아니할 리가 없다.
신 각도 동소문으로 나간 사람임에는 틀림 없다. 적병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따라 나갔다. 신 각이 이 양원의 무리와 다른 것은 그가 양주(楊州)에서 이 양원을 만나 때마침 올라 오던 함경 남도 병마 절도사 이 훈(李훈) 의 군사와 합하여 서울로부터 노략질하며 내려 오는 적병을 깨뜨려 모가지 육십여 급을 베인 것이다. 사월 십 삼일 적병이 부산에 상륙함으로부터 적병이 경상. 충청 . 경기도를 석권하는 동안에 우리 사람이 적병을 이긴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양주의 첩보를 듣고 백성들이 기뻐하는 양은 시로 비길 데가 없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부원수 신각이 양주에 전승한 지 사흘 만에 개성에 쫓겨 가 있는 왕으로부터 신각을 베라는 교지를 가진 선전관이 와서 신각의 목을 잘라 버렸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김명원이 한강에서 도망하여 임진강을 건너서야 비로소 정신을 수습하여 장계를 하되. 자기가 한강을 지키지 못함이 마치 부원수 신 각이 자기의 호령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달아난 데 있다는 것같이 하였다. 이것을 볼 때에 여러 사람들은 패군장의 책임 전가로 생각지 아니함도 아니었으나 우의정 유 흥도 그 흥분 잘하는 어조로.
『 주장의 호령을 아니 들은 자는 죽음이 마땅하오?』
하고 바로 추상 열일같이 대의 명분을 내세우는 통에 주장 없는 왕은 그리로 솔깃하여 베이라고 전교를 내린 것이다. 아마 이것이 유흥의 필생의 공적일 것이다. 이튿날 양주에서 부원수 신 각이 적병을 깨뜨리고 육십여 급을 베었다는 첩보를 받고 왕은 크게 뉘우쳐 곧 선전관을 뒤따라 보내었으나 벌써 늦었다.
패 장군 김명원의 손에. 승전한 신각이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