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을 먹기가 바쁘게 대간은 다시 영상 이 산해를 탄핵하였다. 왕은 마침내 이 산해를 파하고 좌의정 류성룡으로 영의정을 삼고 최흥원(崔興源)으로 좌의정을 삼고 윤두수(尹斗壽)로 우의정을 삼았다. 그러나 류 성룡이가 수상이 된다는 것은 서인들에게는 더욱 견디지 못할 일이었다.
서인들의 말에 의하면. 신묘년에 일본에 보내었던 사신 황 윤길(黃允吉). 김 성일(金誠一) 두 사람 중에 서인인 황 윤길은 반드시 일본이 불원에 우리 나라를 침범하리라고 바로 보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만일 황 윤길의 말대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할 것을 믿고 병비를 하였던들 오늘날 이 꼴이 되었을 리가 있느냐. 그런데 동인인 김 성일이가 부사이면서도 정사인 황 윤길의 말에 반대하여 결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버하지 아니하리라. 평수길은 아주 하잘 것 없는 인물이라고 한 것을 이 산해. 류 성룡이 제 당파에 일편된 사곡한 마음으로 김 성일의 말을 옳게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 나라를 그르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산해를 탄핵한 「교걸 오국(交結誤國)」이라는 죄는 당연히 류 성룡도 질 것이라고 해서 또 들고 일어나서 오늘 아침에 새로 난 영의정 류성룡을 탄핵하였다 실로 동인편에서는 . 서인들의 이 논죄에 대하여서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일본이 침범하지 아니하리라고 김 성일의 말을 믿은 것은 분명히 이 산해와 류 성룡의 비록 죄까지는 아니라고 치더라도 밝지 못함이라는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왕은 평소에 그렇게 믿어 오던 이 산해와 류 성룡을 동시에 파하기가 난처하였으나. 또한 다수 서인들의 앙탈을 막을 힘도 없어서 그날 저녁때에 류 성룡을 파하고 최흥원(崔興源)으로 영의정을 삼고. 윤두수(尹斗壽)로 좌의정은 사고. 유홍(兪泓)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유흥은 서울을 버리기를 크게 반대하면서도 맨 먼저 처자를 관북으로 피난시킨 위인이다.
개성에 와서 하루를 무사히 지내니 왕을 따라 온 백관들은 서울을 버리고 떠난 것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두고 온 집과 처첩이 그리웠던 것이다. 왕도 이 사람들의 말에 감동이 되어서 서울을 떠난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승지 신집(申潗)을 서울로 보내어 서울 형편을 알아서 곧 귀한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신 집이 임진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오웕 초삼일에 서울은 적병의 손에 들어갔다.
서울은 어떻게 함락이 되었나 - 유도 대장(留都大獎)이 양원(李陽元)은 성중을 지키고. 도원수(도원수) 김명원(김명원)은 한강을 지켰다. 남을 hdhf라 오는 적병이 서울에 들려면 한강을 건너야 할 것은 이 양반들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월 삼일. 해가 낮이나 되어서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가 제천정(濟川亭)에 앉아서 유월 염천에 서늘한 바람을 쪼이면서 미희로 하려금 술을 따르게 하고 종사관으로 더불어 시를 짓던 것이다. 이분네가 도원수라 하나 병법을 알 리가 없어서 척후를 쓰지 아니하니. 적병이 앞고개 너머까지 와도 알지 못하고 운자를 다노라고 애를 쓰다가 적구이 강 저편에 온 것을 보고는 군기와 화포와 모든 기계를 강중에 집어넣고 도원수의 옷을 벗어 버리고 미리 준비하였던 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고 도망하였다. 종사관(종사관) 심 우정(沈友正)이.
『대감이 국가의 간성이 되어서 도성을 지키다가 싸워서 죽을지언정 어디로 간단 말이요?』
하고 명원의 소매를 붙들었으나 명원은.
『가서 행재를 지켜야 하지.』
하고 소매를 뿌리치고 달아났다.
『에끼. 게 같은 자식!』
하고 종사관 심우정은 김명원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내지르고 혼자 잔병을 데리고 적병을 막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