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진 싸움에 이 순신이 승전한 영향은 어찌 되었나. 둘째 번명 나라 청병도 팔월 십 오일 남원(南原)의 패전에 기세가 꺾이어 서울을 버리고 물러가 압록강(鴨綠江)을 지키자는 말까지 났었다. 명균의 생각에는 일본군을 저항할 수 없다고 믿었다.
원래 명균은 일본군을 무서워함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유년에 둘째 번 청병되어서 조선에 온 경리사(經裡使) 형 개(邢价)는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외교적으로 일본군을 물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심유경은 벌써 일본이나 명 날 조정에나 신용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풍신수길이 봉을 받고 명나라를 섬기는 충성을 가졌다고 명나라 황제를 속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풍신수길의 군사가 다시 조선에 건너 왔다는 보고가 북경 조정에 이르매. 양 방형(楊方亨). 심유경(沈惟敬)등 책봉사로 갔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을 믿고 추천하였던 병부 상서 석성(石星)까지도 죄를 입게 된 것이었다 이러하므로 형 개의 명을 받은 심유경은 몸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서 조선 유정(사명당)으로 하여금 「형 총독이 대병 칠십만을 거느리고 오니 곧 퇴병함이 일본에 이하리라. 나는 싸우이 일기를 원치 아니하는 생각으로 이 말을 미리 보내는 것이니. 후회가 없이 하라」하는 밀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청정은 서생포(西生浦)에 유진하고 있었다. 그는 심유경에게 이렇게 회답을 썼다.
『 』
번역하면.
「태사(심유경을 가리킴)의 말에 대명병이 쓸어 나온다 하니 이는 소원이라.
조선병은 도무지 적수가 되지 아니하니 대명병과 쾌히 한번 싸웟 조선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명나라 북경까지 불살라 버릴 터이니. 머리를 들리지 말지어다.
이런 좋은 일이 또 있는가.」 이러한 편지를 받은 심유경은 말할 것도 없고 명병도 간담이 서늘하였다.
사실 가등청정은 겨울이 되기 전에 압록강을 넘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벽파진에서 마다시의 대함대가 참패를 당하매. 일본군은 전진할 기운을 잃어 버렸다.
왜 그런고 하면. 조선은 팔년풍전에 백성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육지에는 양식이 넉넉지 못한 데다가 조정에서는 체찰사 이 원익(李元翼)의 계교에 따라 경상. 충청. 경기 제도에 청야법을 행하였다. 장정과 부녀와 양식과 재물을 모두 산서으로 옮기고 평지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경성과 압록강을 향하자면 군량. 군기를 바다로 운반하지 아니하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군이 조선 바다의 재해권을 가지는 것은 군사 행동을 위하여서는 절대로 필요한일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순신이 벽파진 싸움에 져서 일본 함대에게 경강으로 통하는 길을 주었다면. 그 싸움이 있는 지 열흘이 넘지 못하여서 서울이 함락되었을 것이요. 다시 한 달이 넘지 못하여서 가등청정의 계획대로 압록강에 다다랐을 것이었다.
이렇게 되매 일본군은 겨울이 가깝다는 것을 핑계로 전진 계획을 버리고 순천(順天). 사천(泗川). 김해(金海). 부산(釜山). 기장(機張). 울산(蔚山) 등 해안 요지에 혹은 성을 쌓고. 혹은 집을 짓고. 혹은 밭을 갈아 반영구적 준둔 계획을 세우고. 다시 때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군의 전진 기세가 돈좌되는 것을 보고 조선의 조정과 명균도 기운을 얻어 한 번 싸워 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