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이나 되어서 과연 적의 포성이 들렸다. 배들은 모두 겁을 집어 먹었다.
순신은 만일 피하는 자 있으면 군법 시행한다고 엄명하고. 총포와 활을 준비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적선의 포성은 점점 가까이 왔다. 순신은 나는 듯이 섬 그늘에서 배를 몰아 나오며 일성 포성을 놓아 북을 울렸다.
순신이 탄 배가 앞서 나가는 것을 보고 부하 제선들도 포성을 내며 따라 나섰다. 벽파진에 머물러 있던 피난선들은 포성을 듣고 인제 횃불을 들고 오락가락하였다.
일경 동안이나 포성이 계속하다가 적선은 달아나고 말았다. 구월 구일. 바닷 바람은 찼다. 군사들은 아직도 여름옷을 입었다. 겹옷을 어디서 구하나?
피난선은 점점 늘었다. 순신이 여러 번 적선을 쳐물리쳤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더욱더욱 순신을 신뢰하고 모여 들었다.
순신은 선인 중에 낫살 먹은 사람을 불러 지금 군사들이 겹옷이 없고 또 먹을 것이 없으니. 모아 내기를 청하였다. 이 선인은 다른 선인들과 의논하고 옷과 쌀과 생선을 모아 순신에게 바쳤다. 비록 조금씩 모은 것이지마는 수백척에서 모은 것이라 적지 아니하였다.
또 진도와 해남 백성들이 송아지와 돼지를 갖다가 바치는 이가 있으므로.
순신은 구월 구일을 잡아 군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열 두 척 병선이 한데 모야 가지런히 연결해 놓고. 장수나 군졸이 모두 한데 모여서 먹고 마시고 소리를 하고 춤을 추었다. 순신도 장졸들 틈에 섞이어 손수 술을 따라 주고 위로하였다. 이날은 마침 바람이 거울과 같이 고요하고. 진도와 해남의 모든 섬과 산들은 맑은 공기와 일광 속에 또렷또렷하였다. 장졸들의 잔치를 베풀었다.
그들 중에서 나이 오십이 넘은 사람에게는 순신이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그사람들은 순신에게 술을 권하고 고기를 권하였으나 순신은 술을 받아 먹어도 고기는 먹지 아니하였다.
초아흐레 반달이 바로 벽파성 위에 걸릴 때까지 잔치는 계속하였다. 그러나 순신은 장졸이 취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다. 그래도 장졸이나 백성이나 모두 난리를 잊어 버리고 오래 못 보던 래평 시절을 당한 듯이 즐겼다. 이때에 적의 촉후선 이척이 산 그늘에 숨어서 감보섬(甘甫島)까지 들어 왔다. 그는 순신의 함대의 허실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신은 영등 만호(永登萬戶) 조계종(趙繼宗)에게 명하여 적선을 잡으라 명하고 여전히 잔치를 계속하였다. 군사들도 모두 기운을 내어 활을 쏘고 배를 저었으나 적선은 달아나 버렸다.
십 사일에 임영준(任英俊)이 해남 방면을 육지로 정탐하고 돌아 와 보고하기를. 적선 이백여 척이 칡머리를 돌았는데 그중에 오십 오척이 벌써 어란진에 왔다 하고 또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중걸(仲乞)이라는 사람의 말에. 적이 말하기를. 조선 주사 십여 척이 자기네 배를 엄습하여 사람을 만히 죽였으니 보복을 해야 한다고 하고. 또 자기네 병선을 많이 불러다가 이 순신의 주사를 다 멸한 뒤에 곧 경강으로 올라 간다고 하더라고 하였다. 이 보고를 듣고 순신은 그 말을 다 믿지는 아니하였으나. 적의 대부대가 엄습해 온 것이 확실함을 알고 곧 전령선을 우수영에 보내어. 큰 싸움이 생길 터이니 백성들은 피난하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