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에도 이 몽학(李夢鶴)의 난이 있어서 크게 떠들었으나 그것은 충청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모양으로 중앙 정부에 대해서 민심이 이반하는 중에도 전라도는 우심하였다.
또 명병에 대해서는 당시 명병을 친히 본 지방에서는 다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였다. 명병이라면 소졸까지도 오단 무례하고 행학이 막심하여 적군이나 다름이 없는 데다가 일본과 싸워서 이겨 본 것은 평양 싸움 하나뿐이요. 평양 싸움에서도 앞장을 서서 큰 공을 이룬 것은 조선 군사였다. 이 여송(李如松)은 벽제관 한 싸움에 꽁무니를 빼어 달아났고. 유정(劉挺)같은 자는 싸움은커녕 도리어 적에게 배수되어서 이 순신의 행동을 방해나 놓을 뿐이었다. 그렇거늘 조정에서 적군이 거의 다 물러간 때에는 주둥이로 주전론을 주장하여 이 순신의 싸우지 아니함을 공격하든 무리가 한번 일본군이 다시 건너오매 한 놈도 몸소 나아가 싸울 용기가 없고 오직 게 모가지와 처첩의 무리를 안보하기에만 급급하여 명 나라에 애걸하여 또 청병을 하여 온 것이었다.
일본과 싸우기 전에 『먼저 조정에 앉은 가특한 놈을 죽여 버려야 한다!』
하고 외친 것은 이 몽학(李夢鶴)뿐 아니라 모든 혁명군의 표어였고 전국 백성의 소리였다.
남원과 전주에 명병이 와서 백성들은 지긋지긋이만 생각하고 응하는 빛이 없음이 이때문이었다.
팔월 십 사일에 일본군이 삼면으로 남원성을 에워 싸고 성하에 이르러 싸우기를 청하였다.
명총병 양 원(陽元)은 남문 밖의 민가를 온통 불살라 버겼다. 그것은 성밖에 나아가 적군을 맞아 싸울 용기는 없고. 오직 적군이 숨어서 싸울 자리를 없이 하기 위함이니. 겁 많은 장수가 잘하는 방법이었다. 싸움도 못 이기고 백성들의 집만 살라 버린다고 백성들은 울고 원망하였다.
십 오일 밤에 적군은 풀을 베어 단을 만들고 성밖에 파놓고 해재를 메웠다.
적군이 밤새도록 이 큰 역사를 하는 것을 모르고 명병은 중추라 하여 술과 떡을 먹고 탕질하게 놀았다.
이튿날 새벽에 적군은 사면으로부터 성으로 기어 올랐다. 이에 놀란 명 총병 양원(陽元) 이하 장졸은 성주에 있던 재물을 약탈하여 몸에 지니고 말을 타고 북문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어디를 가오?』
하고 북문을 지키던 조방잔 김경로(김경로)가 양원의 말을 붙들고 눈을 흘겼다.
『싸우지 아니하고 어디를 가오? 대인은 황의 명을 받아 가지고 이 남원에 싸우려 오지 아니하고 놀러 왔었소? 양가 여자를 함부로 희롱하고 민가의 재물을 모두 약탈해 가지고 어디로 간단 말이요? 이 문은 열수 없소.』
하고 딱 버티었다. 김 경로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양원은 처음에는 무례하다 하여 위협하려 하였으나 조선 군사의 형세가 자못 불온한 것을 보고.
『전주(全州)에 가서 청병해 온다.』
고 김경로에게 문 열기를 간청하였다.
『안되오. 남원성에서 같이 죽읍시다.』
하고 김경로는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양원은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에게 문 열기를 명하였다.
이복남은 김 경로가 명장에게 거역하는 것을 보고 죄가 자기에게 올까 두려워하여 김경로에게 문 열기를 명하였다.
경로는 대장의 명을 어길수 없어 문을 열었다. 양원 이하로 명병들은 앞을 다투어 북문으로 내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