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양으로 여드레나 두고 계속하여 국문하였으나 순신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순신은 죄를 자복하거나 말거나 실군기(失軍機)라는 죄 하나는 벗을 수가 없는 것이라 하여 십 이일에 유유의 판결을 내렸다.
다음에 남은 것은 형의 양정이었다. 죽일 것인가 목숨은 살리고 다른 벌을 줄 것인가. 조정에서는 사형론이 우세하여 아무도 감히 순신을 위하여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리해서 대세는 순신의 사형에 기울어질 뿐이었다.
이러하는 동안에 울산(蔚山)에서는 사명당 유정(유정) 과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의 사이에 담판이 개시되었다가 파멸되어 전쟁이 다시 벌어진 것이 분명해 지매 사람들은 이 순신 같은 명장을 죽이는 것을 겁내게 더욱 왕의 생각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순신을 위하여 변명하거나 목숨을 빌어 주는 이가 없으니 왕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라야 어찌 되었던 내 사사 감정만 만족하면 고만이라는. 또 세력 잡은 웃 사람과 자기가 속한 당파의 다수 군중의 비위만 맞추어 벼슬 올라 가기로만 일을 삼는 사간원(司諫院)이니. 사헌부(司憲府)니. 심지어 학문으로 업을 삼아 일세의 풍교를 제 손에 쥐었다는 홍문과(弘文館)이니 하는 데 있는 주책없는 젊은 관리들이 들고 순신을 죽이라는 상소로 일을 삼으니 순신의 목숨은 실로 풍전 등화와 같았다.
이때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이 일어나.
『( ......) (순신은 명작이니 죽이는 것은 옳지 아니하나이다. 군사상의 이해 관계는 멀리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니 순신이 나아가지 아니한 것이 반드시 뜻이 없음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온즉 청컨댄 널리 용서하시와 훗날 공을 세우게 하소서.)』
하는 것이었다.
정탁(鄭琢)은 전 대신이요. 국가의 원로라. 그의 말에 대하여서는 감히 정면으로 다투는 이도 없었다. 이에 왕은 순신의 순을 특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였다.
사월 초하루에 순신은 사를 입어 출옥하였다. 이날부터 순신이 원수진에 가는 동안을 그의 친필로 쓴 일기를 보자. 그는 오래 못하였던 일기를 출옥하는 날부터 시작하였다. 일기는 물론 한문이다. 『 ...
......
...
......
...』
이것이 첫날 일기다. 번역하면.
「사월 초하루. 신유. 맑다. 원문을 나와 남대문 밖 윤 생간의 집에 가니 봉.
분두 조카와 아들 울이 있고 사행과 원경도 같이 앉았다. 함께 오래 이야기할 새 윤지사 자신이 와서 위문하고 비변랑이 순지도 찾아 왔다. 윤지사는 저녁때에 돌아가더니 술을 차고 다시 오고. 기헌도 왔다. 이순신(방답 첨사이던)도 술을 차고 와서 함께 취하여 정회를 풀었다. 파부사 정탁과 심판서 회수와 김 이상명원과 이 참판 정형과 노 대헌 직과 최동 지원과 곽동지 영도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