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심유경(沈惟敬)이 몸소 부산으로 가기로 하였다. 조선에서는 황신(黃愼)으로 하여금 심유경의 접반(接伴)을 삼았다. 그리고 책봉정사 이 종성(李宗城)과 책봉 부사 양 방형(楊方亨)과의 접반사로는 이조 판서 이 항복(李恒福)과 호조 판서 김수(金수)가 임명되었다 독자도 기억하시려니와. 이 항복은 명나라에 내부(內附)하기를 주장하던 도승지었고. 김 수는 난리 초에 경상 감사로서 달아난 사람. 뒤에는 이 순신과 부산 협격을 약속하고도 피신한 사람이었다.
황신은 심유경을 따라 부산에 이르러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진에 들어갔다.
소서행장은 황신이 자리에 앉기를 거절하였다. 황신은 성을 내어 밖으로 뛰어 나왔다 행장은. 천관(天官)에게 실경이 될까 보아 그러한 것이라 하여 그 잘못됨을 사하고 다시 황신을 불러들여 앉히고.
『조선도 이러한 기개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버티어 가는 것이요.』
하고 위로하였다.
황신이 앉은 자리에서 심유경이 소서행장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본군이 전부 철퇴하여야 책봉사가 부산에 온다는 것이었다. 황신이 없는 곳에서는 심.
소서 두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였는지 알 수 없었거니와. 아무려나. 소서행장은 심유경을 진중에 머무르고 자기만「나고야」에가서 수길(秀吉)을 보고 명령을 들어 가지고 온다하여 배로 부산을 떠나서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 모양으로 명 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지리한 외교적 절중(계사. 갑오. 을미.
병진 사 년)이 있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주전. 주화 양파가 갈리어 동서 당쟁을 겸하여 싸우기에 끝이 없었다.
주화론자로 먼저 발언한 것은 전라 감사 이정엄(李廷嚴)이었다. 이 정엄은 연안부(延安府)를 지키기에 공이 있던 사람이다. 그는 지금 국세가 피폐하고인민이 이산하였으니 잠시 화의를 들어 월왕 구천(越王 句踐)의 십년 생취. 십년 교훈(十年生聚. 十年敎訓)하고 아신상담(臥薪嘗膽)하던 것을 본받아 실력을 양성한 뒤에 한번 싸워보자는 것이었다.
이 정엄의 의견에 대하여 주전의 여론이 벌떼같이 일어나 대간은 정엄을 죽이기 가하다고 극언하였다. 이것이 갑오녀 오월 일이었다.
그달 이십 육일에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왕에 부름을 받아 일구렇할 때에 좌찬성(左贊成) 성혼(成渾)을 대동하였다. 대개 원래 주전론자이던 류성룡은 명나라를 믿을수 없음과. 인민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어서 조석을 난 보이니. 명 나라로 하여금 외교책으로 미봉지계를 삼아 적의 형세를 늦추고 안으로 국방을 힘써서 서서히 도모하자는 의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마침 성혼(成渾)이 성룡과 뜻이 같으므로 그를 데리고 일궐한 것이었다.
왕이 성혼을 보고 주전. 주화에 대한 의견을 하문하매 성혼은.
『지금 국세가 위기 일발이오니 잠시 싸움을 쉬고 자강을 도모함이 옳은가 하오. 우리나라가 이미 능히 싸우지 못하고 도리어 명나라의 강화책을 반대한다는 것은 옳지 아니한가 하오.』하였다.
왕은 성혼의 말을 못마땅히 여겨서 대답이 없었다.
이때에 마침 위에 말한 이 정엄의 주화 장계가 올랐다. 성혼의 말에 대하여서는 감히 입을 벌리지 못하던 무리들이 정 엄의 장계가 오르매 벌떼같이 일어나.
『정 엄은 베어야 하오.』
하고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