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이광수

Chapter 115: 10

이때에 명나라의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심유경(沈惟敬)의 진언을 믿어 일본 외교를 개시하기로 결심하였다.

위에도 말하였거니와. 풍신수길(풍신수길)은 나이도 많고 조선과 명나라의 사정에도 어둡고 하여 기어코 조선과 명나라를 때려 이기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지마는. 부하 장졸은 대개 싸움을 원치 아니하고 어서 본국으로 돌아 가기를 바랐다.그들은 싸워서 아무 소득이 없고 공연히 인명만 상하는 것임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 덕형(李德灐)을 통하여 가끔 조선의 조정에 화의를 청한 것이었다.

오직 가등청정(加藤淸正)만은 풍신수길의 뜻을 받들려 하였으나 그의 세력은 소서행장은 및 지 못하였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沈惟敬)은 서서 비탄수(小西飛彈守)라는 일본 자웃를 청화사로 제리고 북경에 가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통하여 명 나라 조정에 일본의 강화 조건으로.

첫째. 풍신수길을 왕으로 봉할 것.

둘재. 해마다 조공하기를 허할 것을 제출하였다. 이른바 봉. 공(封. 貢) 두 조건이었다. 일본측의 제출 조건에 대하여 명 나라 조정에서는 응징설(膺懲設)과 허화설(許和說)이 분분하였으나 명 나라 역시 끊임없는 내란에 국력은 피페하여 도저히 전쟁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벽제관 싸움의 큰 패전에 일본군의 무서운 맛을 보아 도리어 화의를 들어 큰 패전에 일본군이 무서운 맛을 보아 도리어화의를 들어 주는 것이 후환이 없으리라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봉은 상관 없지마는. 공은 불가하다는 설이 유력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풍신수길을 왕으로 봉하는 것은 별로 명나라에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공을 허락해 해마다 일본 관민이 명 나라 구경에 출입하는 것은 백해가 있고 일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명 나라 조정의 의견은「( ) (봉은 허해도 공은 허치 아니한다)」으로 결정이 되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책봉정사(冊封正使)로 이 종성(李宗誠). 부사로 양 방형(楊方亨)을 일본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심유경은 석성에게서 많은 기밀비(일본 군인 요인을 매구한다는)를 받아 가지고 종성. 방형. 정부 양사를 따라. 따른다는 것보다도 차라리 데리고 조선으로 향하여 을미년 사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종성 등은 책보(冊寶)와 백을 가지고 풍신수길(豊臣秀吉)로써 일본 왕을 봉하러 가는 길이라 하여 서울에 머물러 일본군이 조선 지경에서 전부 철퇴하기를 기다려서야 떠난다고 일컫고. 날로 부산. 울산 등지에 있는 일본군에게 속히 철퇴하기를 교섭하였다.

이 종성은 개구리를 좋아하여 전라도 남원에 내려 와 앉아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개구리를 잡아 들이게 하며 날로 소를 잡아 새 술을 명하고 새 계집을 들이라 하여 그 폐단이 여간이 아니었다. 천사라고 하니 그의 위엄은. 무서웠다.

그를 따르는 장졸뿐 아니라 조선 지경에 있는 명 나라 장졸들은 거의 다 한 둘의 조선 여자를 처첩으로 삼았다. 누구의 딸이든지 명 나라 장졸의 눈에 들기가 무섭게 빼앗기고 말았다. 처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내도 그러하였다.

그래서 젊고 아름다운 여자로서 명병에게 가기를 싫어하는 이는 길에 명병을 만나면 일부러 한쪽 눈을 감아 애꾸가되거나. 한 다리를 절어 절름발이가 되거나. 입을 한편으로 찌그려 얼굴을 보기 흉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종성. 양 방형 등은 이 모양으로 호강만 하고 있는 동안에 편지를 가진 사자만 부산으로 오르락내리락하나 일본 군사는 철퇴할 기미도 보이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