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이광수

Chapter 106: 7

류 성룡은 황주에 앉아 황해 감사 유영경(柳永慶)에게 이문하여 황해 연안의 곡식을 황주 기타 직로에 연한 각읍으로 실어내이기를 명하고.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에게 명하여 김응서(金應瑞) 등의 군사 중에 싸움을 강당 못할 만한 자로 하여금 평양으로부터 곡식을 져나르게 하기를 명하고. 또 배를 대동달 하류에 삼현오읍(三縣五邑)으로 보내어 거기 쌓인 곡식을 싣게 하였다.

이리하여 류 성룡은 죽을 힘을 다하여 군량을 판비하였다.

이 여송(李如松)의 대군이 개성부(開成府)에 들어 간 것이 정월 이십오일.

대군이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은 실로 류성룡의 공이었다.

이때에 평양에서 패한 소서행장의 군사가 서울로 들어와 평양에서 명군에게 속은 말이 전하매 이것이 다 조선 사람의 괴계라 하여. 서울에서는 정월 이십 일에 조선인 대학살이 개시되었다. 이것은 또 경성 안에 있는 조선 사람이 명군과 내응할 것을 두려워하는 의심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이날에 서울에 있던 조선 사람은. 특히 일본군에 붙은 상류 계급을 내어 놓고는 하나 아니 남고다 살육을 다하였다고 한다. 또 촌락도 많이 불을 놓아 서울 장안이 하우 동안에 초토가 되고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적군은 앉아서 서울을 지킬 것이냐 나아가 명군을 맞아 싸울 것이냐 하는 두 가지 의론이 있다가 마침내 서대문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입화 종무(立花宗茂)가 선봉이 되고. 죽전국주(粥前國主)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주장이 되어 명군을 중로에 맞아 싸우기로 작정되었다.

개성부에 든 명군 중에는 또 여러 가지 의론이 생겼다. 사 대수(사대수)는 급격 물실론을 주장하여 곧 서울을 공격하기를 주장하고. 전 세정(錢世楨)은 궁구 물추론을 주장하여 서서히 적의 귀로를 끊기를 주장하였다.

이렇게 유예미결하는 동안에 임진강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서울서 도망하여 온다는 사람 하나가 「서울 있던 일본군은 반이나 도망하였다.」하는 말을 전하였다.

이것은 아마 일본군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명군의 마음을 놓게 하는 수단인 듯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말 한마디는 마침내 이 여송의 결심을 재촉하는 힘이 있어서 이십 칠일에 이 여송은 몸소 선봉이 되어 대군을 몰고 개서을 떠났다.

임진가에서는 류 성룡이 명군이 지체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각처에서는 류 성룡이명균이 지체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각처에서 칡과 갈을 모아 굵은 도아줄 몇 오리를 꼬아 임진강을 건너 놓고. 동아줄 눈에 굵은 막대기를 가로 놓아 뜬 다리를 만들어 대군이 말을 타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여송의 대군이 파주(波州) 동파(東波)역에 다다른 것이 그날 석양이었다.

이튿날 조선 장수 고 언백(高彦伯)이 조선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고. 부총명사 대수(査大收)가 명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 경성을 향하고 적군의 정세를 살피기로 하였다.

고언백. 사 대수의 군사가 벽제관(벽제관)을 지나 박석 고개(벽제관)에서 십오리. 서울에서 삼십리. 혜음 고개(혜음고개)에서 이십리 되는 곳에서 일본군 정찰대와 마주쳐 싸워 일본군 백여 명을 베었다.

이 보고를 듣고 이 여송은 일본군도 무섭지 않다는 생각을 얻어 이 여송이 땅에 떨어졌다. 따르던 장수들이 놀라 이 여송을 붙들어 일으키고 이것이 무슨 흉조나 아닌가 하여 겁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