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는 여주 구미포(麗州龜尾浦)에서 적병을 깨뜨려 여주. 이천(利川) 양근(楊根). 지평(地坪)의 백성을 적병의 손에서 구하였고. 훈련 봉사(訓練奉事) 군 응주(權應주) 정대임(鄭大任) 등은 향병으로 영천(永川)의 적병을 깨뜨려 신녕(新寧). 의성(疑城). 안동(安東) 등 여러 고을을 안보하였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晋)은 군기사화포장(軍器寺火疱匠) 이 장손(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잔천뢰(飛擊震天雷)라는 것으로 적병의 큰 근거지가 된 경주(慶州)를 깨뜨렸다.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는 조선이나 중국에 예로부터 없는 것인데 군기사 화포장 이 장손이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었다.
대완구로 써면 진천뢰는 탄환이 오륙보를 날아 가서 떨어졌다가 그 속에서 불이 발하여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터져 철편이 별같이 날아 한방에 삼십여 명이 즉사하고. 맞지 아니한 자도 땅에 엎더져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적병은 이거을 가장 무서워하여 귀신의 조화라고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같은 이가 의병장을 유명하였고. 경상도에서는 현풍(玄風)에 곽재우(郭再祐). 고령(高嶺)에 김민(金민). 합천(陜川)에 정인홍(鄭仁弘) 예안(예안)에 김해(金海). 유종개(柳宗介). 초계(草溪)에 이 대기(李大期). 군위(軍威)에 장사진(張士珍) 등이 다 의병장으로 싸웠다. 그주에도 현풍 곽재우는 가장 재략이 있어 그가 솔나루( )루 지키매 적병이 감히 의녕(宜寧) 지경을 범하지 못하였다.
충청도에는 계룡산 중 영규(靈圭)가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용감히 싸웠고. 조헌(趙憲). 김홍민(金弘敏)이 산겸(李山謙). 박춘무(朴春茂). 충주(忠州)에 조덕공(趙德恭). 조웅(趙雄). 청주(淸州)에 이봉(李逢) 같은 사람이 다 의병으로 싸워 죽었으며.
경기도에는 우성전(禹性傳). 정숙하(鄭淑夏). 수원(水原)에 최흘(최흘).
고양(高揚)에 이 노(李魯). 이산휘(李山輝). 남언경(南彦經). 김탁(金琢). 유대진(兪大進). 이 질(李질). 홍계남(洪季男). 왕옥(王玉) 같은 의병장이 있었다.
이때에 사명당(四溟堂)은 금강산 표훈사(金剛山表訓寺)에 있었다. 적병이 산중에 들어오매 다른 중들은 다겁을 집어 먹고 달아나고 오직 사명당만은 눈도 거들떠 보지 아니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적병들은 감히 사명당을 범하지 못하고 그중에는 합장하고 가는 이도 있었다. 이때에 류 성룡(柳成龍)이 안주(安州)에 있어서 사방에 글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를 청한 글이 오니 사명당은 법당에 중들을 모아 놓고 부처 앞에서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중들이 모두 사명당의 정성에 감동하여 나아가 죽기로써 싸우기를 맹세하였다.
이에 사명당은 금강산 여러 절고 이웃 고을 여러 큰 절의 중을 모아 천여 명 승병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평양에서는 고충경(高忠卿)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아 자주 평양에는 고충경(高忠卿)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아 자주 평양의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오십 일로 기약을 삼고 명나라로 돌아간 후 오십 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것을 보고 소서행장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심유경의 언약을 지켜 오십 일 동안에는 평양성중에 군중에 군사를 거두어 동하지 아니하였으나 십 일월이 되매.
『( )』
이라 하여 의주를 공격할 것을 선언하고. 또 평양에서 적군에게 잡혔다가 도망하여 돌아 온 사람에게 들으면. 평양의 적군은 성을 공격할 군기를 많이 준비한다고 하였다.
이 소문은 의주의 조정을 심히 무섭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