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後悔) · 한용운

Chapter 5: 5

창수는 이튿날 저녁에 성숙을 찾아갔다.

"어제 실례했네."

하는 말로부터 인사를 끝내자마자,

"그런데 자네는 남매간에 얼굴이라든지 모든 것이 비슷하 지도 아니하니 웬 일이야? 아마 자네 대부인(大夫人)이 젊어 서 무슨 딴 일이 있은 모양이지?"

하고 창수는 우선 자기가 의심하고 있는 한경의 정체를 알 기 위하여, 어색스러운 진정의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 고 농담 비슷하게 물었다.

"에이 미친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성숙은 별로 다른 의미를 느끼지 아니하고 심상한 농 담으로만 알았다.

"아닐세, 자네 대부인이 온전하고서야 동기간에 그렇게 다 를 수가 있나. 자넨들 그렇게 변호할 무슨 증거야 있겠나?"

하고 창수는 더욱 젖혀서 성숙의 입에서 무슨 다른 말이 나올까를 기다린다.

"그런 말을 실없는 말이요. 한경이가 나의 친동생이 아닐세." 하고 성숙은 창수를 보고 웃는다.

"친동생이 아니라니, 그럼 무슨 동생이란 말인가?"

하고 창수는 자기의 의심하던 것이 맞은 것은 허락하면서 그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우리 아 버지가 후취를 얻으셨는데, 한경이는 우리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아일세. 그래, 그 애 성은 정가일세. 그러나 그 애가 세 살 적에 들어와서 우리 집에서 길러 내었는데, 인정이 들 뿐 아니라 아이가 영리하고 얌전하여서, 우리 아버지도 친딸같이 사랑하고 나도 친동생보다 오히려 더 사랑하네.

그래 그 애 성도 최가로 고치고 우리 집으로 입적을 시킬까 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너무 고지식한 어른이라 그럴 필요 가 없다고 말았는데, 저도 나중에 그런 줄을 알고서 우리 집으로 입적을 하겠다고 하지마는, 아버지가 듣지 아니하여 서 그만 두었지. 그런데 그 애의 출가시키는 것은 물론이지 마는, 어디까지라도 뒤를 보아 주려고 하네."

하고 성숙은 다시 얼굴빛을 고친다.

"아! 그런가? 어쩐지 모든 점으로 보아 동기간 같지를 아니 하데. 그러나 어려서부터 길러 내었으면 인정에 있어서는 친동생이나 다름이 없겠지."

하고 창수는 적지 아니하게 의심하던 일에 해혹하여서 시 원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런데 회사를 좀 하여야겠는데 자네 같이 가세."

하고 성숙을 본다.

"회사? 가려면 같이 가지마는 회사 아니하면 어떤가?"

하고 성숙은 자기 동생에 대한 일이니만큼 겸사의 말을 하 더니,

"그런데 가만히 있게. 전화를 하여 보고 가야지, 그 애가 학교를 다니는 외에는 개인 교수를 받으러 다니니까 여관에 붙어 있는 때가 적어서 그저 갔다가는 못 만나기가 쉬우니까." 하고 전화실로 가서 전화를 하고 오더니,

"조금 기다려야 하겠네. 여관으로 전화를 하니까 없다고 하 여서, 개인교수 받으러 다니는 데로 전화를 하니까 곧 여관 으로 돌아가서 전화를 하겠다고 하였네. 조금 기다리세."

하더니 다시,

"그런데, 자네 한경이를 보니까 어떤가?"

하고 딴 말을 꺼낸다.

"어떻기는 무엇이 어떻더냔 말인가."

하고 창수는 웃으면서 성숙을 본다.

"첫인상이 어떻더냐 말일세."

"첫인상은 무슨 첫인상? 인상이고 무엇이고 받을 사이가 있었나? 잠깐 보고 흩어졌는데……그리고 우리는 남을 처음 으로 대할 때에 경건하게 대할 뿐이요, 별로 유심히 보지를 아니하는 성미일세. 더구나 여성에게 대해서는 더욱 그렇지." 하여서 창수는 경경(輕輕)히 말하기를 피하였다.

"아! 이사람아, 인상이라는 것은 별 것인가. 누구든지 처음 으로 대하면 자연히 인상이 나타나는 것은 별 것인가. 누구 든지 처음으로 대하면 자연히 인상이 나타나는 것이지. 일 부러 인상을 받을래서 받는 것이 아니거든. 인상이라는 것 은 첫눈에 뜨이는 감상일세그려. 첫 번으로 사람을 대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예쁘다든지, 밉다든지, 순탄해 보인다든 지, 까다로와 보인다든지, 재주 있어 보인다든지, 미련하여 보인다든지, 그런 것이 다 인상이지 별것인가. 그래 사람을 대할 때에 그러한 인상이 없단 말인가?"

하고 성숙은 조금 불쾌한 듯한 어조로 웃으면서 말을 한다. "이 사람아! 인상에 대한 철학을 그다지 천자 가르치듯 아 니한대도 그것쯤야 모르겠나마는, 별로 인상 줄 만한 무엇 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이 무디어서 그 렇다는 말일세. 그런데 기탄없이 말하자면 상당한 미인일세.

그렇고 퍽 영리하고 재주 있어 보이던데."

하고 창수는 처음 보는 처녀를 그의 오빠에게 대하여 미인 이니 영리하니 하는 말이 실례인 듯도 하고, 자기로서 미안 도 하여서 좀처럼 말하지 아니하려다가, 피차에 허물이 없 는 터에 그만한 말쯤이야 관계 없을 뿐 아니라, 성숙으로서 는 그러한 말을 들어 보려는 눈치인 듯하여서 비로소 말을 하였으나, 그래도 조금 혐의쩍은 듯하였다.

"어지간히 보았네. 그런데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나?"

"글쎄,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런지 그 밖에는 모르겠네."

"그렇지, 자네뿐 아니라 흔히들 그렇게 보네. 그렇지만 그 애에게는 숨은 덕이 있네. 인정미가 있고 얼굴이 미인이다 뿐이겠나. 그렇지만 알고 보면 마음씨가 얼굴보다 더 예쁘지. 그 애에게는 얼굴 보다도 재주보다도 그것이 더 장처(長 處)거든. 그러니까 그 애의 배필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일세." 하면서 성숙은 탄식하듯이 말을 한다.

"성인이 나면 기린이 나고, 장사(狀士)가 나면 용마가 난다구. 그래도 하늘이 자네 누이동생일 낼 적에야 자네 매부감 도 내었겠지. 배필이 없을 수야 설마 있겠나."

하고 창수는 반은 조롱삼아서 말을 한다.

"아니 그렇게 한 말이 아니라,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 렵단 말일세. 하기야 조선의 일천만이나 되는 남자 중에 한 경의 배필 될 만한 자격이 없대서야 말이 되나. 또 내 동생 이 비교적 그렇다는 말이지, 무슨 출중한 인물이야 되겠나.

그런데 전일에도 그런 말을 한 번 한 일이 있지마는, 만일 자네가 지금까지 장가를 아니 갔다고 가정하면 말일세. 자 네가 아직 장가를 아니 간 터에 내가 한경이를 소개한다면 내 매부가 될 수 있겟나? 자네가 그 애를 대면하여 보았으 니 말일세."

하고 성숙은 창수를 본다.

"그게 인제 쓸데 있는 말인가?"

하는 창수는 성숙의 말이 쓸데없는 말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듣기 싫지는 아니하였다.

"쓸데없기는 물론 쓸데없는 말이지마는, 나로서는 하도 애 석하게 생각하시 대문에, 기왕 대면하여 보았은즉 내가 소 개르 하였더라도 헛 노릇이나 아니 되었을까 하여서 묻는 말일세. 생각나는 대로 말이야 못할 것 무었있나?"

"하기야 그렇지. 말이야 못할 것 있겠나마는 나는 자네가 소개를 하였더라도 성사가 아니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 이네."

"어찌 그런가?"

하고 성숙은 의심나는 눈으로 창수를 본다.

"그것은 내가 마음에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자네 누이동생이 듣지를 아니하였을 거네."

"어쩐 말인가?"

하는 성숙은 창수의 말뜻을 대강 알아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자네 누이동생에게는 한눈에도 차지 아니 할 것이네."

"자네가 못났다는 말인가. 내 동생의 눈이 높다는 말인가?"

"눈이 높고 낮은 것이야 지내 보지 않고서 어찌 잘 알겠나 마는, 여자가 그만큼 되면 우리 같은 사람은 명함도 못 들 이네."

"응, 어째서 그렇다는 말인다. 은휘하지 말고 본 대로 말을 해보게."

하고 성숙은 무슨 이상한 말이나 들을까 하고 창수의 앞으 로 다가와 앉는다.

"아니,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인물이 뛰어나고 학식이 그만한 여자로서 동경 같은 번화한 도회에서 문견이 늘었으니 여간 남자가 눈에 들겠나. 하니 까 하는 말일세."

성숙은 창수가 다른 이상한 점을 보고서 하는 말이 아니 라, 다만 한경의 모든 것을 지나치게 높이 보고서 하는 말 인 줄을 알고서는 만족한 듯이 껄껄 웃고서,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보았네. 언뜻 보면 그렇게 볼 듯도 하지. 그렇지만 그와는 정반대일세. 그애 얼굴이 뛰어날 게야 무엇이 있겠나마는 하여간 보통 인물은 아니고, 제 학식이 그리 대단하겠냐마는 그래도 여자로서 그만큼 배우고 하였 으니까, 혹은 허영심이 있다든지 정도에 지나치게 눈이 높 아서 돈이나 지위 있는 사람을 고른다든지 할 듯도 하지마 는, 이 애는 절대로 그렇지 아니해. 그저 인물이 병신이나 아니고 믿을 만한 사내면 족하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자유 연애라는 것을 반대는 않지마는, 그것을 그다지 좋게 생각 하지 않는 모양일세. 그렇기에 자기의 결혼 문제는 전부 나 에게 맡긴다고 그러지. 그리고 어제 자네에게 다녀올 때에 슬그머니 자네에 대한 인상을 물어 보지 아니했는가. 그랬 더니 아주 인상이 퍽 좋은 줄로 말을 하데. 자네가 그렇게 본 것은 아주 잘못 본 것일세."

하고 다시 껄껄 웃는다.

"아! 그런가. 내게 대한 인상 말이야 딴판이지마는, 여자가 그만큼 되고 허영심이 없다면 그것은 보통이 아니고 세상에 드문 일일세. 여자가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걸."

하고 창수는 부러워하는 듯이 말보다도 기색으로 칭찬한다. "그러기에 나도 그 점을 더울 취하는 것일세. 사람이라는 것은 양의 바탕에 호랑이 껍질이 되면 못 쓰는 것일세. 그 런데 이 애는 비단보에다 양과자를 싼 것처럼 안팎이 구비 하지. 그런데 겉보다 속이 오히려 낫지. 인제 자네가 차차 지내 보면 알 것인데."

하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고 앉았는 성숙은, 마치 다녀 간 이력이 난 늙은 중매장이처럼 말하는 태도가 정도를 지 나쳐서, 친구를 대하여 자기의 여동생을 말하는 남자의 수 작으론 점잖지 못한 편이었으나, 창수는 그러한 것을 분별 할 사이도 없이 성숙의 말과 말을 모두 통으로 삼켜 버렸다. 그들의 말이 끝나지 아니하였는데, 한경에게서 자기 여관 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한경의 여관은 성숙의 여관이나 창수의 여관이나 다 같은 신전구(神田區)에 있어서 거리가 얼마 멀지 아니하였다. 창수와 성숙이 한경의 여관에까지 오기에는 십 분밖에 아니 되었다. 한경의 여관은 보통 학생 들의 하숙하는 집이 아니고 상당한 고등 여관으로 회관부터 화려하였다.

현관까지 나와서 맞아 주는 한경의 인사와 인도하는 방식 은 흐르는 듯한 일본식의 그것으로 아주 능란하였다. 한경 이 거처하는 방은 한편에 조금 떨어져 있는 조용하고 정쇄 한 팔조(八?) 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눈에 뜨이는 모든 것 은 심상치 아니하였다. 우선 들어가는 문편의 한쪽으로 중 형(中型)의 피아노가 있고, 그 옆에 이층의 책장이 있는데 책장에 가득히 채워진 책은 전부가 양장으로, 책의 대소와 빛깔을 따라서 분류하여 정제하게 세웠는데, 밖에서 보기만 으로도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 책들은 대부분이 음악과 예 술에 관한 책으로 값으로도 상당한 것이요, 영문 서적도 섞 이었으며, 그 옆에는 양복장이 있고 고급의 라디오와 유성 기가 있고, 화장구로도 상당한 고급품들을 놓았고, 두어 분 의 화초도 그럴 듯이 놓여 있어서 어느 점으로 보든지 학생 생활로서 호화한 생활이었다.

"김 선생님이 이런 누지(陋地)에 왕림하시니 감사하다고 하 느니보다 도리어 죄송합니다."

하는 한경의 인사는 스스러운 것을 떠나서 친숙한 태도로 허물 없는 편에 가까웠다.

"어제는 실례를 많이 하였습니다. 오늘 회사를 온다고 온 것이 공부하시는 시간을 방해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하고 창수는 방 안 치장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몸을 바꾸면 서 말하였다.

"천만에, 공부라는 것은 칠판 밑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선생님 같으신 분을 모시고 놀면 일언일동이 다 배울 것인데요, 공부에 방해라는 것이 될 말씀이어요?"

하는 한고비를 넘어가는 이론을 졸지에 대답하기는 창수로 서는 조금 벅찼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비유가 안 되지요마는, 혹은 상당한 인물을 접촉하면 언어 행동에서 다소 배울 것이 있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들으니까, 음악과 예술을 공부하신다는데 그런 것이야 사람을 접촉하는 것만으로써 배울 수가 있습니까?" 하는 말로 겨우 앞을 가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일수록 선생에게서 기계적으로만 배 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큰 예술은 자연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만 배우고 만다면, 누구라도 제자가 선생보다 나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선 생에게서 규칙적으로 배운다 할지라도, 예술의 묘경에 이르 러서는 스스로 얻어야 되는 것인데, 스스로 얻는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배워서 마음으로 얻는 것이겠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예술품입니다. 대예술 가는 한 풀이나 한 나무에서도, 새소리나 꽃 그림자에서도 무한한 예술의 진경을 볼 수가 있는데, 하물며 구비하지 아 니한 것이 없으면서도 지정지묘(至精至妙)하게 된 사람에게 서이겠습니까. 저는 만일 예술가가 되는 날이 있다면 구구 하게 남의 발자취만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고 얼굴빛을 고치며 자부하는 듯하는 기색을 띠는 한경 의 말에, 창수는 자세히 이해하기도 어려운 구절이 있어서 대답이 곤란하였다. 창수는 조금 주저하다가,

"참 그렇습니다. 말씀부터 대예술가의 소질이 있는 말씀입 니다. 뉴유튼이 능금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력(引力)을 발견 하고, 와트가 차관에 물 끓은 것을 보고 증기 기관을 발명 한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조용히 연구를 하여야 될 터인데, 이렇게 손이 찾아와서 수선을 떨 며는 안 되겠지요."

하여서 한경의 말을 어수룩하게 좇아 주는 듯하면서 마침 내 자기의 처음 주장을 세웠다.

"선생님, 처음으로 한 번 오셔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까, 이 다음 좀처럼 오시지 아니할 뿐 아니라, 만일 제 가 자주 뵈오려 간다면 공부에 방해되신다고 대단히 불편해 하시겠네."

하고 한경은 창수를 흘금 보고서 다시 성숙을 본다.

"나는 쓸데없이 체면 차리는 말을 하는 것 재미 없어. 서로 찾을 만한 사람이면 얼마든지 찾을 것이지, 공부에 방해 되 느니,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였느니, 그러한 야틈야틈한 말 따위는 그만 두었으면 좋을 거다. 우리는 사람이 털털해서 그런지, 마음에 맞는 사람이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찾아가 고 또 몇 번 오더라도 반갑고 그러하더라. 그거야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일 년에 한 번도 찾아가기가 싫은 것 이고, 이따금 찾아와도 눈살이 찌푸려지지마는, 마음에 맞기 만 하면 자주 오기는 고사하고 밤낮 같이 있어도 좋지."

하고 성숙은 다시 한경을 보면서,

"그런 이론은 그만 두고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대접할 것 이나 내 놓아라. 손님 덕에 나도 좀 얻어먹게."

한다.

"글쎄요. 김 선생님, 무엇이든지 대접을 해야 할텐데, 대접 할 것이 있어야지."

하고 한경이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고 할 즈음 에, 문 밖에서 한경을 찾는 여관 하녀의 소리가 난다. 대답 을 열기 있게 하고 나가는 한경은 조금 있다가 술상을 가지 고 들어오다가,

"무엇 대접할 것이 있어야지. 청요리를 몇 접시 시켜 왔는 데 김 선생님이 청요리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오빠가 좋아하시기에 좀 시켜 왔는데."

하고 술상을 내려 놓더니,

"김 선생님, 청요리 잡수실 줄 아세요?"

하고 창수를 보고 웃는다.

"예, 먹는 격식은 모릅니다마는 먹기는 남의 두 몫을 먹습 니다."

하고 창수는 술상을 들여다보면서 침을 삼키는 시늉을 한다. "이것, 미리 준비를 하였구나, 차린 것을 보니까."

하고 성숙은 술상을 둘러 보더니 한경을 향하여 웃는다.

"준비가 무슨 준비에요. 갑자기 시켰더니 아무것도 없군요.

준비를 하였으면 설마 이렇게만 하였을라구요."

하고 한경은 미리 준비하지 아니하였다는 기색을 보이기 위하여, 시침을 떼는 듯이 하면서 성숙을 흘겨 보는 듯이 웃는다.

창수는 혼자 빙긋이 웃었다. 청요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 두었다가 청구만 하면 곧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청 구를 받은 뒤에 임시임시로 만드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가 져올 수 없는 일이요. 더구나 해삼탕이나 도미찜 같은 것은 특별히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미리 청구한 것이 아니 고서는 그렇게 쉽사리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어서, 미리 준 비하였던 형적이 완연한 일인데, 한경이 시침을 부려 가면 서 준비한 것이 아니라고 무슨 잘못된 일을 발명하듯이 발 명하는 것은, 그다지 큰 거짓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처음 보 는 사람에게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줌직하였다. 그러 나 창수는 생각 할 때에, 여자로서 그만한 거짓말쯤이야 하 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너무 빡빡하 지 아니하고 얼락녹을락 하는 교제적 곡선미라고 생각하여 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안주만 있고 술이 없으니 웬 일이냐? 술은 따로 가져오려고 그러니?"

하는 성숙의 말에 잊었던 것을 깨우친 듯이,

"아이 참."

하고 한경은 양복장 뒤에서 위스키 두 병을 꺼내 놓으면 서,

"이것을 잡수세요. 제가 신경 쇠약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 고서, 어느 분이 위스키와 포도주를 두 병씩 보냈겠지요. 그 런데 내가 술을 먹을 줄 알아야지요. 그래 이때까지 두었더 니 오늘 유용히 쓰이는군요."

하고 마개를 빼어서 조그마한 유리 컵에 두 잔을 따른다.

한경을 심상치 보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뜯어 보려는 창 수는, 그 술에 대하여 심상히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한경은 열팔구 세의 처녀로서 술을 먹을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이겠 으나, 그에게 술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그의 술을 먹고 술을 안 먹는 것을 모르고 보낼 리도 없는 일이요, 술이라는 것 이 신경 쇠약에 이로운 것도 아닌데, 남의 병(病)에 약이나 거기에 마땅한 다른 음식을 보낸다는 것은 모르되, 이롭지 도 아니한 술을 보냈다는 것이 의문이요, 한경의 말에 어느 분이 보냈다는 것을 들으면, 한경의 같은 동무가 보낸 것도 아닌 듯하였다. 만일 같은 여자 동무가 보낸 것이라면 반드 시 어느 동무라고 할 터인데, 어느 분이라고 하는 것을 보 면, 여자라면 노성한 여자요 그렇지 아니하면 남자를 가리 키는 말인데, 모르면 모르되 노성한 여자는 어리다고 할 말 한 여학생에게 먹을 줄 모르는 술을 보낼 것 같지 아니하 고, 반드시 어느 남자가 보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창수는 자기도 모르게 공연히 불쾌하였다.

"우리끼리만 먹어서 안 되겠어요, 같이 잡수셔야지."

하는 창수의 말에,

"천만에, 어디 제가 술을 먹나요."

하고 한경은 다시,

"그럼 저는 술 먹는 대신으로 약이나 먹겠습니다. 그런데 이 약은 포도주에다가 먹는 약이래요. 그래서 포도주를 조 금 먹게 될 터이니까 이것도 손님 대접으로 술을 먹는 셈이 되겠지요."

하고 양복장 근처로 가더니 돌아앉아서 무엇을 꺼낸다.

창수는 성숙이 먼저 술잔을 들고 앉아서 술을 먹으라고 권 하는 것도,

"가만 있어, 같이 먹어야지."

하고 한경이 포도주를 가지고 술자리로 오려니 하고 기다 리고 있었으나, 한경은 돌아앉은 채로 무슨 약을 먹는지 포 도주를 얼마나 마시는지, 먹고 남은 약봉지와 술병을 다시 간직한 뒤에 돌아앉으면서,

"저는 약 먹는 시간이 있어서 먼저 먹었습니다. 용서하세요." 하더니, 다시,

"어서들 드시지요."

하고 술을 권한다. 같은 값이면 포도주를 다만 한 잔이나 반잔을 먹더라도 술자리로 가지고 와서 같이 먹으려니 하고 기다리고 있던 창수는 거의 어이가 없었고, 또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또 이상한 일은 전일에 없던 한경이 자기를 찾 아왔을 때에도 그러한 광경을 보았거니와, 도화색이 되고 화기가 있던 한경의 얼굴이 서로 수작하는 사이에 차차 화 기가 없어지고 얼굴빛이 노르끄무레한 것을 보았는데, 약을 먹는다고 무엇을 먹고 난 뒤에는 금시에 얼굴빛이 회복되고 기분이 명랑하여지는 듯한 것을 발견할 때에, 신경 쇠약의 작용도 이상하지마는 약의 효력도 신기하다고 생각되었다.

창수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려 고 하면서,

"그런데……."

하더니 안주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신경 쇠약이라는 병이 병도 이상한 병이지만, 잡수시는 약 이 무슨 약인지 약도 신효하군요. 약효가 아주 금시 발복이 로군요."

하고 한경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답니다."

하고 허두를 내는 한경은 다시 술을 한 잔씩 따르더니,

"신경 쇠약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데 저의 신 경 쇠약은 독일서 온 병인지, 블란서서 온 병인지, 이상하여 서 꾀병 같기도 하고, 무슨 사증(邪症)들린 것처럼 아무렇지 도 아니하다가, 금방에 정신이 흐리터분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안색이 변해지고 그렇답시다."

하더니 창수를 보고 손을 젖혀서 술잔을 가리키면서,

"어서 드세요, 약주를 잡숴 가며 말씀을 들으세요."

하고 성숙은 먼저 한 잔을 들이켜더니,

"나는 다 아는 일이니까 별로 들을 재미가 없지마는, 처음 듣는 사람은 들을 만하니, 이 애 병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하 다가 난 병이니까 그런지, 병도 문명식으로 앓는 모양이야."

하더니 다시 한경을 보면서,

"그런데 의사의 말에 약도 약이려니와 약보다도 얼마 동안 공부를 쉬고 여행을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전지 요양(轉 地療養)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

하면서 혼자 눈을 끔찍하는 듯하더니 입을 실룩한다. 그리 고 술을 한 잔 손수 따라 들면서,

"나는 술이나 먹어야겠네. 자네도 술이나 먹어 가면서 듣는 것이 훨씬 좋을걸."

하고 술을 마신다.

"나도 먹지. 그러나 술도 술이거니와 얘기 듣는 것이 더 재 미있네."

하고 술을 마시는 창수는 한경을 보면서,

"그래 얘기를 하세요."

한다.

한경은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런데 저의 병이 그렇게 이상야릇한 듯하지마는, 실로는 하잘것없는 병이에요. 이 병은 앓으라면 앓고 말라면 마는 병이에요. 약도 그렇지요. 약이 신효한 것이 아니라 먹기를 신효하게 먹거든요.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웃으시겠지마는 들어 보세요."

하고 웃더니 다시 술을 따른다.

"아! 참 말씀하시기 전에 화제만 들어도 흥미 백 퍼센트인 데요, 어서 말씀하세요. 앓으려면 앓고 말라면 마는 병이라 면 병이 이상하거니와, 그보다도 병을 앓으시는 분이 더 용 하시고, 약도 효력이 나게 먹으려면 먹고, 아니 나게 먹으려 면 아니 나게 먹는 약이라면, 약도 이상하거니와 약을 잡수 시는 사람이 더욱 기이하군요. 어디 말씀하세요."

하고 창수는 무슨 요술쟁이의 말을 들으려는 것처럼 정신 을 모으고 눈을 대어서 한경을 향한다.

웃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흐르는 눈으로 창수의 눈을 슬쩍 보는 한경은,

"말씀할까요."

하고 계속 하여 말을 하려 할 즈음에,

"최 성숙 선생님 계세요?"

하는 하녀의 소리가 문 밖에서 나더니,

"예, 여기 있어요. 왜 그래요?"

하는 성숙의 대답을 듣고서는 다시,

"전화 왔어요."

한다.

"전화?"

하고 성숙은 창수를 향하여,

"잠깐 실례하겠네."

하고 밖으로 나간다. 두 사람은 잠잠하였다. 전화를 하고 돌아오는 성숙은 문 밖에서부터,

"아! 이거 안 되었는데."

하고 들어오더니,

"나는 좀 가봐야 되겠는데 자네는 앉아 놀게."

하고 창수를 본다.

"왜 무슨 급한 일이 있나?"

하는 창수의 말에,

"이 사람 자네 때문에 오늘 실신이 적잖게 되었네. 오늘이 조선 유학생 친목회 간사회인데, 어저께 통지를 받고 시간 에 간다는 것이 자네 때문에 여기를 오느라고 잊어버렸네그려. 어지간한 일 같으면 무어라고 핑계를 하든지 사피를 하 고 아니 가겠지만, 이것은 내가 아니 가면 회가 아니 될 터 이니까 아니 갈 수가 있나. 조금 미안하지마는 용서하게."

하고 벗어 놓았던 외투를 입는다.

"그럼 나도 같이 가지."

하고 일어나려는 창수를,

"아닐세, 앉아 놀게."

하고 성숙은 외투를 입다가 만 채로 창수를 붙들어서 앉히 고, 외투 소매 하나를 마저 꿰더니,

"그럴 것이 있나 앉아 놀게, 무슨 허물 있나. 그리고 나도 가보아서 어지간하면 말이나 몇 마디 이르고 도로 오겠네.

같이 가다니 될 말인가. 그리고 우선 한경이 병 이야기 좀 들어보게 재미있는 말이 많이 있을 테니."

하자,

"김 선생님은 왜 가신다고 그러세요? 오빠는 말씀을 들으 니까 아니 가실 수가 없지만, 김 선생님은 가시지 마세요.

약주도 잡수시다 마시고 변변찮은 이야기지만 말씀도 듣다 마시고…… 김 선생님은 더 놀다 가세요."

하고 한경은 다시 성숙을 향하여,

"오빠도 곧 다녀오세요. 김 선생님 혼자 심심하신데…… 그 리고 간사회에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 있어요. 유학생회라 고 껄렁한걸."

한다.

"껄렁이 왜 껄렁이야? 지금 잘만 되어 나간다. 너는 유학생 회원 아니냐, 남의 말하듯 하게."

하는 성숙의 대답에,

"나도 회원이니까 말이지, 잘은 무엇이 잘 되어. 모이면 쓸 데없는 이론만 캐어쌓고 실제로 무슨 일이 되어 나가야지.

나는 인제 회에도 참례 아니할 터이니, 꼴보기 싫어서. 회할 때 가보면 회하는 데는 정신이 없고서 여학생들 얼굴만 쳐 다보느라고, 망할 녀석들…… 하여간 곧 다녀오세요."

하는 한경은 성숙에게 흘기는 듯하는 눈을 돌리는 길에 창 수를 보고 웃는다.

성숙이 간 뒤에 두 사람은 새삼스럽게 스스러운 듯도 하 고, 체면을 차리는 듯도 하여서 앉음앉음도 다정히 하고 얼 굴빛도 고쳤다. 한경은 한편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깍지 낀 두 손의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면서, 가늘게 뜬 눈으로 방의 한 구석을 뚫어지라는 듯이 바라본다. 마치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을 잡으려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무슨 생각에 골몰하여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심히 무엇을 바라보는 듯도 하였다.

"에구, 내가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하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조금 놀라는 듯이 고개를 돌 려 창수를 보면서 웃더니,

"이야기 좀 하세요."

하고 술을 따라서 창수의 앞에 놓는다. 한경의 시선이 자 기의 눈과 마주치지 않는 틈을 타서, 한경의 모든 것을 온 전히 보면서 그의 아름다운 것을 마음껏 칭찬하고 있던 창 수는, 한경의 명랑한 그러나 애교 있는 말에 다소 신경을 빼앗기는 듯하면서,

"이야기는 하시던 이야기를 마저 하셔야지요. 저는 이야기 를 할 줄도 모르거니와, 할 말이 있더라도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뒤에 나중에 하겠습니다."

하고 술을 들어 마시는 동안에 눈으로는 한경을 본다.

"그럼 하던 말씀을 마저 할까요."

하고 작은 웃음이 떨어질 듯하는 입술을 움직이면서 목소 리를 가다듬는 즈음에,

"그런데 말씀의 허두만 들어도 그 이야기가 재미있고도 이 치가 심원(深遠)할 듯한데요. 말씀을 학리적으로 어렵게 하 시지 마시고 아무쪼록 우리 같은 사람도 알아들을 만큼 통 속적으로 쉽게 해 주세요. 말씀하시기 전에 희망합니다."

하고 웃는 창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움직이고 있는 신경줄의 한 끝을 한경과 머리카락이라도 걸어 보려고 하였다. "에구 선생님두."

하고 간간이 웃는 한경은 웃음을 다그치지 아니한 채로,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언제 문자나 술어를 써가며 학술적으로 한 말이 무어 있어요? 저는 문자나 술어를 써가 며, 말할 줄도 모르지마는, 평생에 말할 때에 되잖게 문자나 술어 푼어치를 써가며 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런 술어를 써가며 말을 한들 선생님 못 알아 들으실 말이 어디 있어요. 저는 입을 봉하고 말을 아니할 테에요."

하고 애교가 사라지지 아니한 그대로의 눈으로 흘기는 듯 이 창수를 보다가,

"선생님두 사람을 놀리시기는."

하고 성을 내는 듯이 눈을 아래로 감는 듯하다가 다시 눈 을 들어서 창수의 기색을 살펴본다. 그러나 한경은 웃으면 서 애교 있는 눈으로 창수를 볼 때보다 성내는 듯한 눈으로 창수를 흘겨 보는 때에는, 가만한 정의 실마리를 뭉텅이째 던져주는 듯하였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할 것이 아닙니다. 우선 말씀하려는 화제부터가 어렵지 않습니까. 앓으려면 앓고 말려면 마는 병이라든지, 효력이 나게 먹으려면 먹고, 안 나게 먹으려면 먹는 약이라든지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마 고차방정식(高次方程式) 풀기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 니까 그러한 화제를 해석하려면 학리적 논리가 아니고서야 되겠습니까? 하니까 토대 지식이 부족한 저로는 그만한 부 탁을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어요. 하니깐 말씀한 것이 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놀리다니 천만에.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여간 이야기나 하십시오."

하고 창수는 웃으면서 미안한 듯한 표정을 보인다.

"에구, 선생님이 정말 어려운 학술적 술어를 쓰시네요. 고 차방정식이니 무어니 하시고. 그런데 고차방정식이라는 말 씀이 무슨 말씀이에요. 우선 그 뜻부터 말씀해 주세요."

하고 한경은 당장에 오금을 박는 듯이 눈을 창수의 얼굴에 서 옮기지 아니하고 말을 한다.

"글쎄요. 그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만 하다가는 정작 들을 말씀은 못 듣기 쉽겠습니다. 말씀하시 지요."

하는 창수는 그 사이의 오고 가는 말이 너무 농담적으로 되었다는 듯이 얼굴빛을 조금 고친다.

"말씀한대야 별로 신기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 문제 를 말씀하기 전에 저의 성격을 먼저 말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성격은 평탄하지를 못하고 이상하여요. 너무 야멸 차서 그런 모양이지요. 무슨 일이든지 하려면 아주 몸을 붙 여서 하고, 아니하려면 당초에 손을 대지 않는 성미에요. 남 처럼 하다 말고 그러지를 못하는 성미에요. 그래 저는 약 같은 데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간 병이 나도 약을 잘 먹지 않는 성미인데, 어쩌다가 약을 먹게 되면 그 약이야 좋든지 나쁘든지 신념(信念)을 가지고 먹지요. 의사 가 토끼똥을 갖다 주고 이것이 약이니 먹으라고 한 대도, 먹으러 들면 꼭 이 약을 먹으면 낫느니라 하고 먹습니다.

그래 그런지는 모르되, 남들은 효력을 못 본 약이라도 나는 먹으면 효력을 보게 되거든요. 만사가 다 그러하지마는 약 도 신념이 없이 먹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에요. 의사들도 그런 말을 한다는데요, 약을 먹으려면 첫째 조건이 신념이 라고. 같은 약이라도 믿고 먹는 것과 밎디 않고 먹는 것이 판연히 다르답니다. 그러기에 요사이에 심령 치료(心靈治療) 니 최면술이니 하는 것이 있지 않아요? 그런 것이 다 심리 작용을 응용하는 것이어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술(施術) 이 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을 이용하려고 억 지로 신념을 내는 것이 아니라 천품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 씀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하려면 아주 전신 돌입을 한답니다. 그런 것이 신사에 해롭지요, 선생님?"

하고 한경은 말을 중지하고 창수를 본다.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래야 쓰는 것이지, 미지근하 니 할락말락해서야 되겠어요."

창수는 한경의 말을 찬성한다.

"그럼 선생님도 그런 성미를 좋아하시는 게로구면."

하는 한경의 말에,

"그런 성미를 나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저는 실행 치는 못하더라도 다 찬성할 일이지요."

하고 창수는 힘있게 말한다.

"그럴까요?"

하고 조금 진정하는 한경은 다시 하던 말을 계속한다.

"그렇기에 저는 그 성격을 가지고 만일 연애를 하게 된다 면 큰일나겠어요."

여기까지 말을 한 한경은 갑자기 얼굴빛이 조금 붉어지는 듯하며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옷자락을 다듬거리면서,

"에구,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 말이 나왔어. 망측스러 워라, 꿈꾸는 것처럼 말이 나왔네."

하고 혼잣말처럼 하는 한경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그런데 약이라는 것이 말이에요, 신념이 있이 먹어야 된다 는 말씀이에요."

하고 다른 말을 하려 하는 즈음에,

"아닙니다. 하시던 말씀을 끝을 내야지요. 연애를 하게 되 면 어떻다는 말씀이에요. 큰일이 난다니 무슨 큰일이 난다 는 말씀이에요?"

하고 창수는 인제야 재미있는 말을 들을 수가 있다는 듯이 젖혔다.

"아니에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연애라고 하였나? 연, 저 옳아, 연예(演藝)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이 빗나가서 연애 라고 되었어요. 연예나, 연애나 비슷하잖아요. 제가 만일 그 러한 성격을 가지고 연예를 하였더면 말이어요. 다시 말하 면 배우가 되었으면 거기에 골몰하여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 리라는 말씀이어요. 에구, 참 이상해라. 말이 왜 헛나갈까?"

하는 한경은 깜짝거리는 눈으로 창수를 보면서 자기 스스 로도 어이가 없는 듯이 앙그러지지 아니한 웃음을 웃는다.

"여자들의 임시로 꾸며 대는 재주라는 것은 자고로 유명하 거든. 그러렸다, 연예나 연애나 어음(語音)이 비슷하니까. 그 리고 연예라고 한 대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럼 그 말씀은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치고서요, 만일 연애를 하 신다면 그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가정 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요새 군비 확장(軍備擴張)에는 가상 적(假想敵)이 있다듯이, 만일 한경씨가 가상 애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고 창수는 한경을 보다가 다시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본다.

"에구, 참 술쳐 드리기도 잊어버리고 잔소리만 하고 앉았네." 하고한경은 술을 한 잔 부은 뒤에 술병이 많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서 병을 들어 창문 쪽으로 대고, 술이 얼마나 남 았나를 보더니, 다른 한 병을 끌어서 가까이 놓고 한손으로 병마개를 누르면서,

"선생님두 참, 왜 꾸며 댄다고 하세요? 제가 거짓말장인줄 아세요. 저는 그 말을 그만둘 테에요. 저는 가상 애인도 없 어요. 그러니까 연애에 대한 말은 할 줄 몰라요."

하고 흘기는 듯한 눈으로 창수의 입까지만 보고 도로 내리 떠서 창수의 눈을 보지 않는다. 창수는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든 채로,

"그러면 꾸며 대었다는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가 상 애인도 없다는 말씀은 수사학(修辭學)을 모르는 저로는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가상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가정한 다는 말씁이 아닙니까? 그러면 누구라도 가상 애인이 없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론 지금 조선의 남자로서 한경씨의 애인이 될 만한 자격이 없을 것은 사실이겠지요. 그러면 한 경씨에게 진정한 애인이 없을 것은 말씀하지 않는대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말이에요. 진정한 애 인은 없지마는, 가령 애인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러한 성격으로 어떻게 연애를 하겠느냔 말씀인즉, 그 말 씀이야 못하실 것이 무엇이어요. 아무리 들을 줄을 모르는 저라도 그런 말씀은 분간하여 들을 줄을 모르는 저라도 그 런 말씀은 분간하여 들을 수가 있겠는데."

하고 들었던 안주를 입에 넣는다.

귀를 기울이고 눈을 깜박거리면서 정신을 차려서 듣는 듯 이 앉았던 한경은 몸을 조금 흔들면서,

"인제 저는 이 말이고 저 말이고 아무 말도 안할 테에요, 선생님하고 말을 하다가는 나중에 바보가 되고 말 터이니.

사람이 왜 공연히 병신 구실을 하여요? 저는 인제 벙어리가 될 테에요."

하고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두 손으로 힘있게 누르는 시늉 을 한다.

"단 둘이 앉아서 하나가 말을 아니 하면 하나는 저절로 벙 어리가 되겠어. 그러면 나도 피동적으로 말하는 벙어리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자동적으로 말 않는 벙어리가 돼야지."

하고 창수는 안주 씹는 것을 멈추고 입을 오므리고 성낸 사람처럼 가만히 앉는 다. 찰나의 광경, 시끄러운 침묵이요 고요한 살풍경이었다. 입과 입은 움직이지 아니하였지마는 마음과 마음은 고요하지 못하였다.

웃음을 참다 다 못 참는 한경의 입은 「픽」하고 터지면 서, 고개를 숙인 채로 얼마를 웃더니,

"에구 선생님두, 선생님 고리 대금을 하셨으면 부자가 되시 겠네요. 사람을 그렇게 졸라대시는 것을 보니까."

하고 창수를 본다. 창수는 여전히 입을 오므린 채로 가만 히 앉았다. 한경은 말이 없이 술을 따라서 창수의 앞에 놓 고서,

"선생님, 이야기 대신 노래나 하나 하겠습니다."

하고 일어서서 피아노 앞으로 가더니,

"사랑이 물 같으면 백두산도 잠기려니, 사랑이 불 같으면 한강수도 말리려니, 사랑의 앞에는 죽음도 없어요. 사랑의 뒤에는 목숨도 없어요. 사랑에 병든 어린 몸이 오니 묻지 말아 주세요. 인간 만사 허다한 중에 사랑만은 묻지 말아 주세요."

하는 노래를 피아노와 반주하는데 소리는 가느나 힘이 있 고, 곡조는 짧으나 억양이 많았다. 창수는 한경의 돌연히 하 는 태도라든지 노래의 사연에 대하여 생각건대, 홀연히 꿈 속에 헤엄치면서 황홀한 지경을 헤매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 를 잊어버릴 만큼 희미하였다. 창수는 물론 음악에 대해서 는 조금도 상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경의 노래가 잘 되었 는지, 피아노가 못 되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을 뿐 아니 라,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하기도 수줍어하고 사피하려고 하던 것을 어찌하여 돌연히 노래를 부르는 바 에, 그 사연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도 당돌하고 뜻 밖이어서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창수는 자기 의 힘으로 한경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의심하기조차 어려웠다. 혹은 한경이 천사같이 보이다가 홀 연히 마귀같이도 생각되고, 혹은 요술쟁이같이 생각되다가 홀연히 예술의 여왕같이 보였다.

저녁해는 둘려 있는 붉은 놀이 서쪽 창을 지음쳐서 한경의 방을 비춰 주는 것이 흡사히 예술의 무대를 장식한 네온사 인의 그것처럼 한 빛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비쳐지는 한경 의 얼굴은 진홍색으로, 분홍색으로, 자금색으로, 감청색으로, 다시 진홍색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변하는 빛은 각각 그 빛 이 아름다움이 있어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치 옛 이야기 에서 들을 수 있는 옥황상제의 시녀가 꽃밭에서 물을 잘못 주다가 득죄하여서 인간에 귀양 오는 길에, 잠시 동경에 들 러서 음악가로 분장한 듯이 생각했다. 창수는 여성을 대하 는 경우에 이만큼 황홀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하 여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는 천하를 희생하더라도 저러한 여자를 사랑해 보지 못한다면, 세상의 재산이니 명예니 지 위니 하는 등의 모든 행복이라는 것이 다 그림자 같고 메아 리 같고 티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꾀꼬리의 그것과 같은 노랫소리는 그쳤으나 앵두 같은 그 의 입술은 아직 움직이고, 다 하지 아니한 피아노의 남은 메아리가 그치기 전에, 높고 낮은 것을 따라서 움직이던 삘 기 같은 그의 손가락은 멈췄다. 교의에서 고요히 일어나서 창수에게 읍하고,

"실례하였습니다, 용서하세요."

하는 한경은 창수의 눈에서 아까의 한경과는 아주 딴판으 로 다른 듯하였다. 얼굴은 어찌 그렇게 예쁘며, 태도는 어찌 그렇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꺾고자 하여도 감히 꺾을 수 없 는 꽃인 듯하였다.

"아! 참 짧은 노래에서 긴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창수는 탄식하듯이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