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後悔) · 한용운

Chapter 4: 4

창수가 집에서 떠날 때에는 미리 가서 입학할 준비를 한다 고 하였지마는, 급기야에 동경에 가서는 아무것도 준비하는 것이 없었다. 무슨 예비 학교를 다닌다든지 강습소를 다닌 다든지, 하다못해 도서관 생활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저 흥뚱흥뚱 놀고 있었으므로 다만 성숙을 따라서 서로 찾 아가고 찾아오는 것이 날마다 하는 일과였다. 어느 일요일 에 창수는 성숙으로부터 상오 열한시에 어느 손님과 같이 갈 터이니 기다려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창수는 누구를 데 리고 오려나 하고 궁금히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 한시가 지나서 거의 오정이 되었을 때에 성숙이 왔는데, 같 이 온 손님이라는 사람은 양장한 젊은 여자였다. 창수는 대 번에 성숙의 여동생인가 하고 추측하였으나, 언뜻 보건대도 얼굴이라든지 모습이 성숙과는 비슷하지도 아니하므로, 혹 은 다른 여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시간이 조금 늦어서 미안해."

하고 들어 서는 성숙은 예의 악수를 하고 팔이 아플 만큼 흔들어 대더니 주인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자기 손으로 방석을 들어 대더니 같이 온 여자에게 앉기를 권한다. 그 여자는 서서 머뭇머뭇하다가 창수와 성숙이 앉은 뒤에,

"누구신지 앉으시지요."

하는 차수의 말을 듣고서야 머리를 조아 답례하고 조심스 럽게 무릎꿇어 앉는다.

"너 인사 여쭤라, 이 어른이 김 선생님이다."

하고 그 여자를 보던 성숙은 다시 창수를 보면서,

"자네 인사하게, 이게 내 여동생일세."

한다.

"아! 그런가?"

하고 창수는 먼저,

"처음 뵙습니다"

하고 그 여자에게 절을 하더니,

"저는 김 창수올시다."

하고 다시 절을 한다. 그 여자는 창수가 절하는 대로 답례 를 하더니,

"저는 정 한경(鄭漢卿)입니다."

하는 소리를 분명치 않게 하면서 절을 하기 시작하는 그 여자는 무슨 소리인지 혼잣말처럼 사부랑거리면서 절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른다.

창수는 한경이 동경에 있은 지 오래 되어서 일본식의 인사 에 습관이 되어서 그렇게 여러 번 절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였으나, 창수가 놀란 것은 한경의 성이 정가라고 하는 것 이었다. 성숙의 성은 분명이 최가인데 한경이 성숙의 동생 일 것 같으면 으레 같은 최가일 것인데, 정가라고 하는 것 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경의 말 소리가 분명치 못하여서 잘못 들었나 하고도 생각하여 보았 으나, 「정」과「최」의 음이 워낙 달라서 근사하지도 않으 니만큼 그다지 틀리게 들을 리도 없는 듯하였다. 그것이 첫 번에 들어올 때에 창수가 본 첫인상이, 그들의 얼굴이 비슷 하지도 아니하여서 남매간이 아닌 것을 추측하였더니만큼, 성숙이 자기의 동생이라고 인사 소개를 할 때에도 다소 의 심을 가졌던 것인데, 정 한경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더욱 의 심이 나서 너무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얼굴을 번갈 아 보았으나, 조금도 같은 구석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성숙 은 몸집이 조금 뚱뚱하고 얼굴이 넓적스름하고 거무튀튀한 데다, 성격은 조금 수선스러우면서도 어느 구석인지 교활스 러워 보이는데, 한경은 키가 호리호리하고 날씬한데다가, 얼 굴은 갸름하고 눈은 가늘며 전체가 미인답게 되어고, 성격 은 영리한 편이면서 간교한 듯이 뵈어서 모든 것이 동기간 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창수는 자기 의 눈과 귀를 스스로 의심할 만큼 마음이 이상하여졌다.

"오빠에게서 김 선생님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진작이 라도 찾아뵈올 터인데 별로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면서도 겨 를이 없어서, 인제 와서 뵈옵게 되오니 죄송합니다."

하는 한경은 절을 세 번이나 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조선에서부터 성숙씨에게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가서 찾아뵈올 터인데 앉아서 뵈옵게 되오니 미안합니다."

하고 창수는 될 수 있는 대로 한경의 얼굴과 거동을 살펴 보았다. 창수가 한경에게 또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 은, 한경의 얼굴빛이 아무 까닭도 없이 삽시간에 변하는 것 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의 두 볼에 도화색이 질리면서 이목 이 깨끗하고 기운이 명랑하여 보이더니, 불과 몇십 분이 못 되어서 홀연히 얼굴이 창백하여지면서 이목과 기운이 약하 고 흐리터부하여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성숙이 일어나려는 자세를 취하려다가 다시 앉으면서 창수를 보고,

"자, 이제부터 이 애를 많이 사랑해 주게. 그리고 만나는 대로 모든 것을 잘 지도해 주게."

하더니 다시 한경을 보면서,

"너 이담부터는 이 선생님을 자주 찾아뵈어라. 그리고 지도 를 많이 받아라."

하고 창수를 향하여,

"자, 그만 가겠네. 오늘 만나서 같이 교외나 산보를 가려고 하였더니 그리 되지 못하겠네. 얘가(한경을 가리키면서) 공 부를 너무 하더니 신경 쇠약이 들렸는지 이따금 기분이 좋 지 못한 모양일세. 아까 시간이 조금 늦게 된 것도 그 까닭 일세. 오려고 할 때에 별안간 기분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서 조금 진정해 가지고 오노라고 늦은 것일세. 아마, 지금도 또 기분이 좋지 못한 모양일세."

하고 다시 한경을 보면서,

"그럼, 오늘은 이만 가자. 이 다음날 자주 뵈옵고 좋은 말 씀 많이 들을 양으로."

하고 먼저 일어선다.

"그럼,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한 번 뵈었으니까, 이담부터 는 자주 와서 뵈옵겠습니다. 많이 사랑해 주시고 지도해 주 시기 바랍니다."

하는 한경은 입술보다 눈이 먼저 웃으면서 창수에게 인사 를 하고, 몸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일어선다.

"아! 그러십니까. 이거 너무 총총하여서 미안합니다. 일간 찾아가서 뵙겠습니다."

하고 창수는 황황히 일어서서 문앞에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다. 그다지 춥지도 아니한 때였건만 털외투에 흰 여우 목도 리를 어깨에 걸치고, 굽 높은 구두의 가벼운 걸음으로 맵시 있게 걸어가는 한경의 뒷 태도를 넋잃은 사람처럼 바라보던 창수는, 그들의 보이지 아니할 때에야 무엇을 잃어버린 것 처럼 서운히 돌아서서,

"하여간 미인은 미인이다. 얼굴도 얼굴이거니와 스타일이 더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왔다. 창수는 무슨 일에 피곤한 사람처럼 방의 한가운데에 벌떡 드러누워서 천 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경의 일을 생각하였다. 첫째로 성 숙과 동기간이라면서 얼굴이 엄청나게 다른 것과, 성이 정 가라고 하였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할지라도 확실히 최 가라고 한 것은 아닌 것, 그것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세상에는 동기간에 얼굴과 성격이 아주 다른 일은 혹 있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성숙이 거짓말을 한 것이냐 하 면,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도 만무하고, 더구나 자기의 동기에 대하여 까닭 없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이라도 성숙에게 물어 보면 알 것이라고 미루어 두고, 한경의 얼굴빛이 변하는 데 대해서는 신경 쇠 약이 발작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추측하여서, 별로 의심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창수는 한경의 얼굴과 태도를 허공에 나타내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한경의 얼굴은 나타날 듯하면서도 용이하게 나 타나지 아니하였다. 뚜렷이 나타나는 듯하다가는 다시 희미 하여지고, 희미하여지다가는 번개같이 나타나기도 하여서, 분명히 보려고 할수록 더욱 아리송하였다. 마치 바람에 흔 들리는 물결을 지음쳐서 물 속에 있는 구슬을 보는 것처럼, 분명히 있기는 있으면서도 그 정체가 비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인상만은 흩어지지를 아니한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미인이라는 것은 감정하기 어렵다. 그 러나 미인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촵촵촵촵 창수는 일어나서 가방에서 사진첩을 꺼내어서 경순의 사진을 보았다. 자기와 같이 박은 결혼 사진을 보다 가 거울 속으로 보이는 얼굴이 도리어 분명치 아니하여, 결 혼한 뒤에 경순이 평복으로 혼자 박은 사진을 보았다. 그것 은 그해 여름에 인천으로 해수욕을 갔을 때에 바닷가에서 소나무를 의지하고 박은 사진인데, 순진한 얼굴과 소탈한 의복으로 사색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천연스럽게 박은 사진 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육체로는 미인이요, 정신으로는 정숙 한 여자였다. 창수는 한참 보다가 눈을 감고서 한경의 얼굴 을 상상하면서 경순의 사진과 비교를 하여 보았다. 물론 자 세히 나타나지 않는 한경의 얼굴인지라 확실히 비교를 할 수는 없으나, 대강의 윤곽만으로 보건데 서로 장단이 있는 듯하여서, 그처럼 우열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듯하였다. 순진 하고 동탁한 중에 애교가 있는 것으로는 경순이 나은 듯하 였으나, 산뜻하고도 아련하면서 전신에 흐르는 태도로 사람 을 끄는 매력을 가진 것으로는 한경이 훨씬 이상인 듯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학문, 언론, 교제 등으로는 워낙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여간 자기 같이 특수한 생각으로 일부러 구 식 여자를 고른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고 시대적 여성 을 말한다면 구슬과 돌의 차이인 듯하였다.

창수는 다시 성숙이 안양에서 만나서 하던 말을 생각하여 보았다. 만일 성숙의 말과 같이 자기가 한경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러면 자기는 당당한 시대적 미 인으로 학식이 구비하여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아니할 만한 한경의 남편으로 내외가 같이 동경은 물론이요, 혹은 런던 이나 파리에까지라도 유학을 하면서 사랑을 속삭일 것이 아 닌가. 그러면 자기가 세상에 「김 창수」라고 알려지는 것 보다 한경의 남편이라고 알려지는 것이 더욱 행복스럽지 아 니할까. 그렇게 생각할 때에 창수는 가볍게 환멸을 느꼈으 나, 한편으로는 자기는 어지간한 남자로 천하의 미인을 아 내로 삼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공론(空論)이 아니라 사실인 듯하였다. 현재에 경순 같은 아 내를 두었고 또한 자기가 구하지 아니하고도 한경같은 미인 의 남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에, 스스로 자부 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종종 다른 사람으 로부터 미남자라는 말을 듣던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들어서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얼굴 을 돌려 가면서 고루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스스로 웃었다. 다시 얼굴의 힘줄을 실룩거려도 보고, 입술 을 움직여서 이빨을 드러내도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도 보 고, 한손으로 양쪽 볼을 문질러도 보았다. 한편으로 쓸어 붙 인 하이칼라 머리를 앞에서 뒤로 쓸어 붙이는 것이 좋은가, 한가운데로 가리마를 타서 양쪽으로 갈라 붙이는 것이 좋을 까도 생각하여 보았다.

"전화 받으세요."

하는 여관 보이의 소리에 창수는 조금 놀라는 듯이 거울을 놓았다.

? 누가 전화를 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전화실로 나가는 창수는, 자기에게 전화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고, 하며는 성숙이나 할 터인데, 성숙 은 다녀간 지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전화할 필요가 없을 듯 하여서 적이 궁금하였다. 수화기를 귀에 대면서도 우선 누 구인줄을 알고 싶었는데,

"김 선생님이세요?"

하는 소리가 여자의 목소리인 것을 들을 때는 더욱 이상하 였다. 급기야에 듣고 보니 그것은 한경의 전화로, 아까 찾아 갔을 때에 몸이 편치 못하여서 속히 돌아오노라고 실례하였 다는 말과, 이후로는 언제든지 찾아갈 터인데 구애되는 일 이 없겠느냔 말과, 밤이라도 관계가 없겠느냔 말이었다.

그리고 배울 것이 많이 있으니까 자주 찾아가야 되겠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창수는 물론 어느 때든지 찾아와도 좋다 는 것과 자기는 언제든지 별로 출입을 아니하고 혼자 조용 히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전화를 받고 들어오는 창수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후부터 자주 오겠다는말은 아까 다녀갈 때에도 한 말이 요, 또는 그러한 말쯤으로는 일부러 전화까지 할 것은 없는 일이요, 밤에 가도 관계가 없느냐는 말 같은 것은 여자로서 겨우 초면에 인사한 남자에게 대하여 하기는 삼갈 바인데, 그렇게 전화를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한 듯하였으나, 하여간 자기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로서 그만큼 자기에게 호 의를 가지는 것은 적지 아니하게 반가왔다. 창수는 다시 중 학생 시대에 여학생들로부터 열애 편지를 받은 것, 중매장 이가 드나들면서 자기의 인물 칭찬하던 일을 회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