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경성역에서 내렸다. 창수가 어디 가서 아주 저녁을 사먹고 가자고 하는 것을 경순은 성숙과 같이 가는 것을 꺼 려서 배가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아니하니까, 창옥도 경 순을 따라서 집에 오게 되었으므로 창수는 성숙만 데리고 어디로인지 가버렸다.
경순은 가회동(嘉會洞)에 오다가 창옥과 갈리고 자기 혼자 저녁을 지어 먹을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자기로 하였다. 경 순은 옷을 갈아 입으려고 벗다가 허리춤에서 떨어지는 편지 를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경순은 떨어진 편지를 얼른 주 워서 주먹에 쥐고 옷을 되는 대로 갈아 입은 뒤에, 가슴이 터질 듯이 북받치는 불쾌한 마음을 진정하려고도 아니하면 서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서 처음부터 보려다가, 돌 연히 무슨 생각이 나는지 편지를 펴면서 위에서부터 돌돌 말아서 접어놓고 맨 끝을 먼저 보았다. 끝으로 성명을 쓰는 자리에는 불행한 최 성숙 올림 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을 본 경순은 뱀을 잡았던 손을 뿌리치듯이 인정 없이 편지를 뿌리쳐 내버렸다가, 다시 고 양이가 쥐를 움키듯이 앙상스럽게 움키어서 박박 찢은 뒤에 두손으로 싹싹 비벼서 되는 대로 태질을 쳤다가, 다시 생각 하고 부엌으로 가지고 나가서 아궁이에 넣고 불을 살라서 다 타는 것을 본 뒤에 재까지 해적여서 없애 버리고 들어왔다. 경순은 자리만을 깔아 놓고 옷도 벗지 아니한 채로 드러누 웠다. 경순은 종일 삐대어서 피곤도 하지마는 조금도 고단 한 생각은 없었다. 경순은 밤 주우러 갔던 것을 여간 후회 하지 아니하였다. 거기를 아니 갔다면, 그러면 편지를 받았 을 리도 없고, 또는 성숙을 보았을 리도 없을 것을, 공연히 가서 그러한 일을 당한 것이 끝없이 불쾌하였다.
경순은 성숙이 한 편지인 것을 안 뒤에는 분김에 사연도 보지 아니하고 찢어서 불살라 버렸으나, 다시 생각하니 그 사연에 대하여 궁금하였다. 그 사연이 물론 자기로서 취할 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였으나, 무슨 특별한 화 단(禍端)이나 나지 아니할가 하고 생각하였다.
? 그 편지 사연은 무엇일까, 한 번 보기나 할 걸 그랬다.
그 사람이 나에게 몰래 편지를 쥐어 준 것은 괘씸하지마는, 그 사람도 그렇게까지 할 때에는 범연한 편지는 아닐 것이다. 반드시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 로 하여서 견디다 못하여 자기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나를 모함을 한다든지, 방자를 한다든지, 심하면 죽이기까지라도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아니하면 자살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자살을 한다는 유서를 써 놓고 죽 어서, 그것이 세상에 발표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할 것인가. 그렇지 않더라도 옛날 늙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내가 여자를 사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그 원혼이 상사뱀이 되어서 몸에 붙어서 따라다닌다던데, 그리 된다면 부끄럽고 무서워서 살 수가 있을까. 남녀간의 관계 로서 별별 일이 다 많다는데 그렇다고 그 사람의 요구를 들 어 줄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편지 사연이나 한 번 보았으 면 좋을 것을 그랬다.' 하고 경순은 다른 생각을 계속하려 할 때에, 문 밖에서 인 기척이 나면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경순이 다른 때 같으면 기침 소리는 말고서 발자취 소리만 들어도 창수인 줄을 알겠지마는, 성숙에게 대한 일을 너무 도 침착히 생각하던 중이라 누구의 소리인 줄도 모르고 다 만 놀라기만 하여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벌써 자나?"
하고 마루에 올라서는 소리를 듣고서야 창수인 줄을 알게 된 경순은, 더 한층 오싹하고 놀랐다. 경순이 일어서서 문을 열려고 할 때에 창수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인제 오세요?"
하고 거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경순은 자기의 기색을 감추려 하면서 창수의 눈치를 본다.
"피곤할 터엔데 일찍 자지. 왜 이때까지 옷도 안 벗고 그대 로 있어요. 날 기다리노라고 그랬어요?"
하고 옷을 벗는 창수는 별로 다른 기색이 없었다.
"별로 곤하지 않아요. 저녁은 잘 잡수셨어요?"
하고 경순은 창수의 모자와 두루마기를 받아 걸면서 적이 안심하였다.
"나는 잘 먹었소마는 저녁을 어찌하였소? 아마 저녁을 아 니한 것 같소."
하고 창수는 방안을 둘러본다.
"먹고 싶지 않아서 그만 두었어요."
하고 경순은 깔아 놓은 이부자리를 다시 정돈하면서,
"고단하실 텐데 어서 누우세요."
하고 자기는 조금 웃목으로 물러앉는다.
"저녁을 굶어서 되나, 청요리나 조금 가져오랄까? 무엇이 좋을까. 설렁탕이든지 아무거라도 갖다가 자셔야지. 나는 잘 먹었는데."
하고 창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한다.
"아니어요, 아무것도 안 먹어요. 먹고 싶으면 무어든지 내 손으로 해 먹지요. 그만 두세요."
하고 경순은 일어나서 창수의 소매를 잡아서 만류하였다.
"정말이요. 시장치 않겠소?"
"정말이지 왜 거짓말을 해요. 스스런 손님인가요. 체모 차 리게."
하는 경순의 입술에는 아직도 어색한 듯한 웃음이 흐른다.
"그렇지만……"
하고 깔아놓은 자리에 쓰러지는 듯이 드러눕는 창수는 한 손을 이마에 얹고,
"술이 조금 취하는데."
하고 혼잣말처럼 하다가 다시,
"내 얼굴이 붉지요?"
하고 경순을 본다.
"조금 붉어요. 술 많이 잡수셨어요?"
하고 경순은 조금 다가앉으면서 창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다지 많이 먹지는 아니했지만……"
하고 창수는 조금 그느스름한 눈을 힘있게 뜨고 경순의 얼 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깊이 찡그렸다가 얕게 펴지는 눈썹, 열리는 입술, 저주의 슬픔에 푸르러졌다가 애교의 꽃에 붉 어지는 귀밑, 그것이 도리의 미의 중화(中和)를 얻어서 분수 밖에 아름다운 듯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창수는 아무리 성숙의 누이동생의 얼굴이 얼마나 예쁘다고 가정하더라도 도저히 경순의 그것을 따를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창수의 마음은 개인 하늘의 달빛같이 명랑하지는 못하였다. 알지도 못하는 동경에 있는 그 여자의 그림자가 길고도 하도 길어서 창수의 마음에 한구석을 가리고 있는 것은 창수 스스로도 깨닫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창수가 아닌 경순이야 그것을 알 수가 있으리요. 경순이가 창수의 얼굴 을 볼때에 그다지 눈동자도 굴리지 아니하고 대어 본 것은 아니나,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는 창수의 얼굴보다 얼굴에 나타나는 마음의 빛을 보려고 하였다. 그것은 창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 여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순으로서 는 꿈에도 모르는 까닭이었다. 다만 성숙이가 창수와 저녁 을 먹는 동안에 무슨 자기에 대한 말을 하여서 창수의 마음 에 무슨 변동이나 생기지 아니하였나 하는 의심을 가진 까 닭이었다. 경순은 창수의 기색이 별로 다른 것이 없는 줄로 보았으나, 어쩐지 어젯밤의 그것과는 같지 아니한 줄로 생 각되었다. 그것은 말이 없는 가운데라도 창수의 얼굴에 그 만한 기색이 나타나는 것보다도, 경순의 마음 자체가 티끌 이 없는 거울이라든지 바람이 없는 봄물처럼 맑고 고요하지 를 못한 까닭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여간 사람 의 심령이라는 것이 이상하기는 이상한 것이었다.
경순은 성숙의 일이 궁금하여서 창수에게 물어 보려고 하 였으나 묻지 못하고 주저하기만 하였다. 그것은 만일 성숙 이 창수에게 대하여 무어라고든지 자기의 말을 하였으면, 자기로서 성숙의 말을 묻는 것이 도리어 창수의 의심을 살 까 두려워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창수가 먼저 그러한 말을 하지 아니하고, 사색도 별다른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성숙이 자기의 말을 하 지 아니한 것이라고 추측되어서, 말을 물어 보려고 하였으 나 그 말이 목구멍에서 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창수는 눈을 감고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경순은 그 기회를 타서 성숙의 말을 물어 보려고 입을 달막거리다가, 창수가 눈을 뜨는 바람에 말은 하지 못하고 혀끝으로 아래 위 입술에 침만 바르고 말았다.
"아! 모처럼 아는 사람을 만나서 술 좀 먹었더니 취하는데." 하고 창수는 기지개를 켜면서 경순을 보고 웃는다.
"그게 누구여요?"
하고 경순은 창수의 말을 기회삼아서 물었다. 그러고서는 더욱 창수의 기색을 살펴보면서 가슴이 약간 울렁거렸다.
"그게 동막(東幕)서 사는 최 성숙이라고, 나하고 친한 친구 인데, 동경 가서 유학하는 중에 잠깐 다니려 왔다가 마침 안양에서 만났는데, 그대로 헤어질 수가 없어서 저녁을 같 이 먹었지요."
하는 창수의 대답은 순탄하여서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게 좋은 사람인가요?"
하고 경순은 비로소 근본 문제에 들어가서 자기 마음의 가 려운 곳을 긁어 보려고 하였으나, 말을 하여 놓고 보니 돌 연히 다른 남자의 좋고 그른 것을 묻는 것이 여자로서 예의 를 잃은 듯하여,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깨달으면서 창 수를 본다.
"그럼, 좋은 사람이기에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이지, 나쁜 사 람이면 나의 친구가 되나요?"
하고 창수는 눈을 경순의 얼굴에서 옮겨서 천장을 쳐다보 면서,
"하지만, 그 사람이 꾀가 많고 정직한 편이 좀 적은 듯하지. 그렇지만 사람은 관계치 않을걸."
하였다.
경순은 성숙이 그 전에 자기에게 청혼을 하다가 실패한 일 과 정거장에서 가만히 편지를 쥐어 주던 일을 말할까 하고 몇번이나 망설였으나, 마침내 용기가 나지를 아니하여서 뜻 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계는 열한시가 지났다. 경순은 고단 한 것을 느꼈다. 조금 깔깔하여지는 눈을 깜짝이면서 방 안 을 돌아보면서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였다.
창수는 홀연히 누운 자세를 고치고 다시 팔을 이마에 얹으 면서, 한숨을 휴우! 하고 내리쉬더니,
"체! 사람이 공부를 한다고 중학을 겨우 마치고 말게 되 니……"
하고 눈을 감고 조금 있다가 경순의 편으로 돌아누우면서,
"여보."
하고 불렀다.
"예?"
하는 경순은 인제야 성숙에게 대한 말을 하려나 하는 충동 을 받아서, 오려던 잠이 달아나고 두 눈이 반반하여졌다.
"이것, 사람이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게 되니 살아서 무 엇을 한단 말이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공부는 형편대로 하는 것이지 공부 를 못하면 못 사나요.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진작 죽었게요." 하고 경순은 눈을 둥글게 뜨고 창수를 본다.
"그는 그렇지 않지요. 경순씨는 본래 공부를 아니하였고 또 여자니까 그러하지마는, 나는 사내 자식으로 명색이 공부를 한답시고 하다가 겨우 중학을 마치고서는 학비가 없어서 대 학을 마치지 못하게 되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소. 지금 세상 은 공부를 아니 하고서는 살 수가 없는 형편인데."
"그러니까 돈이라는 것도 차차 만들면 되겠지요."
하는 경순의 말을 무슨 도리가 있는 듯한 의미로 알아들은 창수는,
"만들긴, 돈을 어떻게 만든단 말이요? 지금은 제 돈 없으면 꼼짝 없이 죽을 세상인데. 경순씨는 무슨 돈 만들 도리가 있겠소?"
하여서 경순의 뜻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여자가 어떻게 돈을 만들어요? 남자가 돈을 만들어야지.
차차 어떻게든 학비를 주선해 보시란 말씀이어요."
하는 경순의 대답에는 아무 흥미도 없이 들렸다.
"돈을 어떻게든지 만들어야 할 터인데, 여기서는 하는 수 없고 만주(滿洲) 같은 데로 나가서 하다못해 아편 장사를 하 든지 노동이라도 하여서 돈을 좀 벌어 가지고 공부를 해야 겠소."
"만주는 위태하다는데, 만주는 귀신 모르게 죽는 수가 많다 던데, 만주는 가지 마세요. 세상 없어도 만주 갈 생각은 마 세요."
하고 경순은 눈썹을 찡그리고 민망한 듯이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렇지, 일사(一死)면 도무 사(徒無死)로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돈이 없이 공부도 못 하고 구차스럽게 사나, 돈을 벌려다가 죽으나 마찬가지라.
하여간 만주로 가기로 작정을 하였으니까, 갔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창수는 경순이 만주는 위태하다고 가지 못하게 하는 약점 을 타서 은연히 시위 운동을 하였다.
"그래 만주로 가시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하고 경순은 놀라는 눈으로 창수를 본다.
"그럼 가기로 작정을 하였으니까 말을 하지, 말만 하고 말 터이면 말을 하여서 무엇을 하는가요."
"오늘로 급작히 그러시는 것을 보니까 아마 최씨를 만나서 그런 말씀을 들으신 게로군요."
하고 경순은 창수가 갑자기 만주로 간다는 것이 성숙의 권 고인 줄로 짐작하였다.
"아니오, 그 사람은 나 만주 가는 문제에 대해서 얼토당토 않소. 그 사람이 아무쪼록 동경으로 유학을 가자고는 말하 더군. 나는 만주 갈 생각을 가진 지는 오래나 그럭저럭 이 때까지 못 갔는데, 이번에 최씨가 유학을 가자고 하는데 자 극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람이 조금도 만주 갈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이때까지 만주를 생각만 하고 못 간 것도 말하자면 경순이 때문이지. 사실 경순이를 떨어지기도 싫고 또는 경순이를 혼자 두고 가기가 미안도 하고 해서 이때까 지 못 갔는데, 원체 딸리는 학비를 변통할 수가 없고, 공부 를 아니할 수는 없는 터인즉, 부득불 만주로 가기를 작정한 것이지. 낸들 그렇게 위태한 만주로 가기가 좋아서 간다는 것은 아니오. 더구나 경순이를 혼자 두고 가기는 죽기보다 싫지마는 어쩌는 수가 있어야지. 하여간 돈 없는 놈은 살 수 없는 세상이야."
하고 창수는 안간힘을 쓴다.
경순이 창수의 말을 듣는데는 사리가 그럼직도 하나, 모두 가 전에는 들어 보지 못하던 말이었다. 만주 같은 데도 간 다는 말은 꿈에도 듣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혹시 다른 사 람들이 돈을 벌러 만주 간다는 말이 나면 그것이 다 허황된 일이라고 비판까지 하던 터이요, 공부를 더 하겠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던 것인데, 그 날 저녁에 갑자기 그런 문제를 꺼내는 바에 몹시 조급하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였으나, 창 수의 말과 같이 진작부터 그러한 생각이 있었으나,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바꾸어 말하면 자기를 떠나기가 어려워서 말도 내지 않고 있다가, 사세가 만부득이한 지경에 이르니 까 부득이하여서 말을 하는 것인가도 싶었다. 또는 창옥의 말을 생각하건대, 자기 시아버지가 한 달에 삼십 원씩은 줄 터이니 동경으로 유학을 가라고 하는 것도 다른 핑계를 하 고 아니 갔으나, 기실은 자기를 떨치고 갈 수가 없어서 못 갔다는 말을 종합하여 본다면, 그 사이에 그러한 말을 내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러나 매월에 삼십 원씩을 준다면 그것을 가지고 고학이라도 함직하고, 또는 고학까지는 아니할지라도 부족되는 것은 달 리라도 변통함직한 일인데, 그것을 다 불구하고 위험하기가 짝이 없는 만주까지 간다는 것은 다시 알 수 없는 일인 듯 도 하였다. 그러나 동경에 가서 공부를 하려면 학비는 얼마 나 들며, 모든 형편은 어떠한지를 순전히 모르는 경순으로 는, 그 일의 가부를 확실히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들으니까, 아버님이 한 달에 삼십 원씩은 주신다고 하셨다 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 돼요?"
하고 경순은 유학하려면 학비가 얼마나 드는 것을 대강이 라도 알고 싶었다.
"어데서 들었수?"
"창옥이가 그러던데요."
하고 경순은 눈을 분명히 뜬다.
"동경 가서 유학을 하려면 삼십 원 가지고는 턱이 닿지를 아니하오. 돈을 넉넉히 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 통으로도 백 원 이상은 써야 하오. 거지처럼 지낸대도 오륙 십 원은 가져야 지내는데 삼십 원 가지고 문제가 되나. 또 그거나마 아버지에게 있어서 준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지 변통을 하여서 주신다는 것인즉, 끝끝내 대어 주시게 될 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요, 끝까지 대어 주신다 할지라도 공부 좀 하자고 삼사 년 동안을 부모에게 고생을 시키는 것 이, 자식으로서 할 수가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렇거든 그 것 가지고 공부나 하게 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할 바 에야 공연히 부모에게 걱정만 시키고 나도 공부를 합네 하 고 갔다가 중도에 말게 된다면 차라리 아니 간 것만도 못하 게 된것인즉, 그 노릇을 누가 하겠소. 그러니까 아니 간 것 이지."
하고 창수는 일어나 앉으며 궐련에 불을 붙인다.
"그렇지만 없는 사람이 돈을 쌓아 놓고 공부를 할 수가 있 어요. 그리저리 변통해 가며 쓰는 것이지. 그러면 아버님이 삼십 원씩 주신다면 반은 되는 셈이고 반은 부족되는군요?"
하는 경순의 말소리는 명랑하였다.
"그렇게 치면 그렇지."
"그러면 삼십 원쯤이야 변통을 못하세요?"
"어떻게 변통을 하오. 한 푼 없는 놈이 한 달에 삼십 원씩 을 어떻게 변통을 하느냐 말이요."
"그렇지만……"
하고 경순은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렇지만, 만주는 가지 마세요."
하고 고개를 들어 창수를 보고 상긋 웃는다.
"무슨 도리를 만들고서 가지 말라고 해야지, 덮어놓고 가지 말라고 하면 되오. 그래 만주를 아니 가고도 될 만한 도리 가 있겠오?"
창수는 경순의 기색에 무슨 기대를 가지면서 말을 하고 웃 는다.
"도리가 무슨 도리에요, 여자가……."
"그러면 도리도 없이 왜 가지 말라고 하우?"
"위태하니까 가시지 말라는 말이지, 그리고 또……."
하고 경순은 눈을 들어서 창수를 보려다가 다시 눈을 아래 로 뜬다.
"그리고 또라니, 또 어떻단 말이요?"
"또 멀리 가셔서 오래 계시면 안 되었으니까 그렇지요."
하고 경순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유학하러 가 삼사 년 있게 되면 어떻게 할 테요?"
"그럿은 공부하러 가는 것이니까 어쩌는 수가 없지마 는……"
"그럼 공부하러 가는 것은 어쩌는 수가 없지마는, 다른 데 를 가면 안 된다는 말이요?"
"그러면요, 공부를 하러 가시는 것은 어쩌는 수가 없지마 는, 공연히 다른 데는 왜 가세요? 더구나 만주같이 멀고 위 험한 데를. 그리고 부득이 어디든지 가선 오래 계시게 된다 면 나도 같이 가야지, 혼자 떨어져서 어떻게 살아요. 만주로 정 가신다면 나도 따라가서 살 테에요."
하고 발버둥을 치려는 것처럼 몸을 흔들면서 말하는 경순 의 태도는 너무도 순진하였다.
"만주로 가서 돈을 벌려면 같이 갈 수는 없는 형편이거든."
하는 창수의 말은 힘이 없었지마는,
"그것은 안 되어요. 나는 싫어요. 암만 해도 만주는 못 가 세요."
하는 경순의 말은 열이 있었다.
"그런데 만주로 아니 가고도 되려면 될 수가 있는데……"
하고 창수는 경순을 보면서 말을 멈춘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 왜 만주로 가신다고 그러세요?"
하고 경순은 적이 다행히 여기는 빛을 띤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는 하는 수가 없고, 경순이가 들면 될 수가 있는데 말하기가 어려워서."
"내가 들면 될 일이에요?"
경순은 뜻밖의 일을 듣는 것처럼 덩들하여 묻는다.
"그렇지, 경순이가 들면 될 수 있지."
"내가 들어서 될 일이면 열 번이라도 하지요. 그러면 왜 진 작 말씀을 아니하셨어요. 무슨 일이에요, 말씀하세요."
하고 경순은 의심하면서도 자신 있게 말한다.
"학비라는 것은 삯주어 들어가는 것 같지마는, 실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저금하는 셈이거든. 왜 그러냐 하면, 공부를 할 때에는 돈을 쓰게 되지마는, 공부를 하고 나면 돈을 벌게 되니까 말이요.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게 되면 학비만 뺄 리가 있나요. 학비 들인 것은 물론 얼마 안 가서 빠질 것이 요, 그것으로 생활도 하고 돈도 모을 수가 있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학비라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임시로 변통하여 볼 수만 있으면, 그것은 졸업한 뒤에는 곧 갚게 될 것인즉 몇 해 동안 취해 쓰는 셈이요, 아주 소비하는 것이 아니거든.
그렇지 아니하오?"
하고 경순을 본다.
"그렇지요. 졸업한 뒤에 무엇을 하든지 갚게 되겠지요."
하고 경순은 창수의 말을 따라서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피차에 그런 사리를 아는 터이면 서로 변통해 쓰기가 쉬울 이이 아니냔 말이요. 그것이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로, 상담(常談)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거든. 그렇 지 않소?"
"그렇지요, 피차에 좋은 일이지요."
"그러니까 경순이 가 들면 될 수가 있단 말이요."
"글쎄, 말씀을 하세요."
"말을 하면 꼭 듣겠소?"
"그야 들을 만하면 듣고말고요."
"들을 만한 일이기에 말이지, 들을 수 없는 일이야 말을 할 리가 있소?"
"글세, 그러지 마시고 말씀을 하세요."
하는 경순은 자뭇 초조하여 한다.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을 하였다가는 듣 지 아니하면 말을 아니한 것만 같니 못할 뿐 아니라, 도리 어 정의 까지 상하게 될는지 모르니까 그리하는 것이요."
하고 창수는 경순이 말을 아니 들을 수가 없도록 뒤를 다 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내외간이라는 것은 한몸과 같아서 평생의 고락을 같이하는 것인데, 서로 곤란한 때를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 있어요. 죽을 말이라도 들을 터이니 어서 하세요."
하는 경순은 초조가 지나쳐서 흥분이 되었다.
"그러면 말을 하지. 다른 말이 아니라, 장모님께 말씀을 해 서 학비를 변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생각이 어떻소?"
하고 창수는 조금 긴장된 눈으로 경순을 본다. 밤은 고요 한데 어디서인지 닭의 울음 소리가 난다.
경순은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경순이 처음부터 창수의 사정을 들을 때에, 학비가 엇어서 공부를 못하는 일이라든 지, 학비를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에 간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 사정이 너무도 딱하였고, 또는 창수가 진작부터 만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자기를 떠나기 가 어려워서 이때까지 못 갔다는 말을 들을 때에는 너무도 감사하였고, 또는 그만큼 괴로웠다. 그리하여 어찌하면 그렇 게 절박하게 된 자기 남편의 난관을 면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졸이다가, 천만 뜻밖에 자기가 들면 될 수 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기도 하고 한편 으로는 다행하게도 생각하였다. 하여간 자기로서 그 일을 해결할 수가 있다면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피하지 아니하려 고 하였다. 가령 자기의 몸을 임시로 남에게 방매하여서 남 의 집의 더부살이가 되고 종이 된다 할지라도, 학비만을 만 들 수가 있다면 사양치 아니하려고 하였다. 또는 들은 말에 의하면 병인으로서 수혈(輸血)하는 수가 있다 한즉, 어느 부 자 사람의 수혈이 있다면 자기의 피를 팔아서라도 또는 어 떠한 고초를 겪는 일일지라도 하려고 하였다. 물론 경순이 가 그러한 일을 조목조목이 붙여서 하려고 한 것은 아닐지 라도, 대개 그만한 정도의 어려운 일일지라도 창수의 학비 를 변통할 수가 있어서, 창수로 하여금 만주에를 가지 않고 기쁘게 동경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면, 물론 조금도 사양하 지 않고서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 친정 어머니에게 학비를 변통하여 달라는 소 리를 들을 때에는, 다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이 자기의 가슴을 치는 것처럼 뜨끔하고 아찔하면서 이마에 땀에 솟는다. 그러면 아까 자기가 생각하던 바 그만한 어려운 일이라 도 하겠다는 데에 견주어 본다면, 자기의 친정 어머니에게 그러한 말을 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는 것보다 지극히 쉬 운 일이어서,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인데, 경순이 그다 지 놀라는 것은 무슨 일인가? 그것은 경순으로서는 다른 일 에 대하여 자기의 땀과 피를 희생하기는 오히려 쉽지마는, 웃고 말하는 사이에 자기 어머니 앞에서 그러한 사정을 이 야기하기는 어려우며, 또는 다른 어려운 일은 하다가 아니 되더라도, 학비를 변통하지 못하는 이외에 다른 별 일이 없 지마는, 자기 어머니에게 변통하다가 아니 되면 한때의 학 비만 틀어지고 말 뿐이 아니라, 만일 그 일로 말미암아서 창수와의 사이에 감정이 생간다면, 자기의 백년 생애에 적 지 아니한 틈이 벌어지게 되는 까닭이었다.
경순이 자기 어머니의 성격과 규모와 사정을 생각할 때에, 도저히 될 수가 없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자기 어머니가 소년 과부로서 가시덤불 같은 세상의 모든 험살궂은 일을 물리치고, 수절을 하여 가며 외딸을 길러낸 성격이라든지, 바느질품을 팔아 가며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고 입을 것을 입지 아니하고 푼푼이 모아서 볏백이나 받에 되고 돈 천 원 이나 저금하게 된 규모라든지, 사위감을 고를 때에 학생 출 신은 방탕하기도 쉽고 변심하기도 쉽다는 이유로 아무쪼록 학교 출신이 아닌 구식 사람을 좋아하던 세상에 대한 완고 한 관찰이라든지, 여러 사람의 권유를 못이겨서 창수와의 결혼을 승낙하였으나 자기가 시집 올 때에 여러 가지로 주 의를 주는 중에,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친정 에는 아무 말도 말고 있다가, 자기가 죽은 뒤에 다 차지하 라는 부탁이라든지, 기타의 모든 점으로 보아서 도저히 될 만한 가망이 없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경순은 마음이 죄 면서 말이 막혔다.
"왜 대답을 아니하시오?"
하는 창수의 젖히는 말은 그다지 명랑하지 못했다.
"글쎄요, 말씀은 해 보지만 어머니가 웬 돈이 그렇게 있겠 어요?"
하는 경순의 말도 혀가 부드럽게 돌아가지 못하였다.
"말도 해보지 아니하고 미리 방탈부터 하시오그려. 탐탁히 말을 한 대도 잘 될지 모르는데, 경순씨 생각부터 그러할 지경이면 애초에 말을 않는 것이 좋을 것이요. 죽을 일이라 도 듣겠다고 하더니 그만한 일을 방탈부터 하니 어디 말과 일과 같소? 그나저나 그 말은 그만두고 잠이나 잡시다."
하고 창수는 경순을 등지고 돌아눕는다.
"아니에요, 방탈이 아니라, 어머니의 일은 내가 잘 아는 바 에 그만한 돈이 있을까 싶지 아니하니깐 걱정하는 말이지, 방탈이 아니에요. 내일이라도 가서 말씀할 터이니 염려 마 세요."
하고 경순은 손으로 돌아누운 창수의 소매를 끌어서 바로 눕게 하려다가, 그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창수의 얼굴을 넘 어다 보면서,
"이리 돌아 누우세요. 방탈이 무슨 방탈이에요. 남의 속도 모르시고 공연히 불안스럽게 그러시네."
하였다 경순은 창수의 몸을 돌리려고 하느니보다 먼저 마 음을 돌리려고 하였다.
"불안이 무슨 불안?"
하면서 돌아눕는 창수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쓰더니,
"잡시다, 그만 오래잖아 날이 새겠소. 나는 졸려서 좀 자야 겟소. 졸리지 않소?"
하였다. 창수의 기색과 말소리가 조금 평탄스러운 것을 본 경순은 적이 안심하면서,
"그럼 잘까요."
하고 창수의 이부자리를 매만져서 덮어 주고 자기도 그 옆 에 드러누웠다. 창수는 약간의 술 냄새를 피우면서 코를 골 기 시작한다. 경순은 눈이 반반하면서 가슴은 뒤숭숭하였다.
전등불에 눈이 부시어서 팔로 눈을 가리었으나, 가리면 가 릴수록 보이는 것이 더욱 많았다. 그 자리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곧 전등이라든지, 옆에 누운 창수의 몸뚱이라든 지, 책상 우에 놓인 경대라든지, 벽에 걸린 시계라든지 그러 한 것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마는, 그 자리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곧 지나간 일, 아직 오지 아니한 일, 창수의 마음, 성숙이 쥐어 주던 편지 사연, 그러한 것들이 역력히 보였다.
그리하여 경순의 팔은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린 수 는 있었지마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마음의 눈을 가릴 수 는 없었다. 그 중에도 제일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내일 이라도 창수의 학비에 대하여 말을 아니할 수도 없는 일이 요,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며, 말을 하여서 그 일이 되면 좋 지마는 되지 아니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자기 어 머니가 처음에는 듣지 않더라도 자기가 진심으로 간곡히 말 을 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생각으로 듣기는 하겠지마는, 그 대신으로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인가. 우선은 학비를 대어 준다 할지라도 졸업한 뒤에 창수가 과연 취직을 하여서 그 돈을 도로 갚아 줄 수가 있을 것인가? 모은 것이 갈피를 잡 을 수가 없어서 생각할수록 한 가닥도 풀리지는 아니하고 점점 엉클어졌다. 이것은 경순이 세상에 난 후에 처음으로 맛보는 쓴맛이었다. 기나긴 가을밤도 경순의 근심보다는 짧 았다. 하늘은 새어서 훤하기 시작하였으나 꿈도 없는 경순 의 마음은 아직도 어두움에 잠기었다.
경순의 친정집은 계동이었다. 계동과 취운정이 한 동리와 다름이 없으며, 경순이 친정에르 가는 일은 별로 드물고, 경 순 어머니가 경순을 보고 싶다든지, 혹 이를 말이 있으면 경순을 찾는데, 그것도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이 요, 주착없이 내왕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계세요?"
하고 들어서는 경순의 소리에,
"경순이냐?"
하고 방문을 열고 급히 나오는 경순 어머니는 조금 놀라는 눈으로 경순을 보며,
"웬 일이냐? 어찌 이렇게 일찍 오니? 아침은 해 먹었니?"
하고 경순이 태도를 살핀다.
"아침은 다 해 먹었어요. 오고 싶어서 왔어요."
하고 웃음을 머금는 경순은 어머니의 뒤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네 얼굴이 왜 못 됐니?"
하고 유심히 보는 어머니의 말에,
"못 되긴 왜 못 돼요?"
하고 경순은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만지면서 속으로, ? 하룻밤 잠 못 잤다고 얼굴이 그렇게 못 되었을까.' 하였다.
"얼굴이 꺼칠하니 못 됐다. 어디가 편찮으냐?"
"아니어요, 어저께 밤 주우러 갔다 왔더니 볕에 그을어서 그럴까."
하고 경순은 다시,
"아 참, 이것 좀 잡숴 보세요."
하고 보에다 싸가지고 온 밤뭉치를 내놓는다.
"그게 무어냐?"
"그게 어제 따 온 밤이에요."
"그런데 밤을 따러 가다니, 어디로 밤을 따러 갔단 말이냐?" "안양이라나요."
"안양이 어디냐?"
"시골이에요. 시골이라도 가까운 시골인데, 예서 한 육칠십 리 된다나 봐요. 그런데 기차로 가니까 잠깐 가고 잠깐 오 던데요."
"누구하고 갔지, 혼자 가진 않았을게구."
"혼가가 뭐에요. 혼자 어떻게 가요. 저희 둘하고 시뉘아이 하고 셋이 갔다 왔어요."
"별세상이다. 시골까지 밤을 주우러 가다니……"
하고 경순 어머니는 이상한 일을 다 보는구나 하는 듯이 서글픈 웃음을 웃는다. 경순은 밤 주우러 갔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될 만한 일은 대강 말하였다. 그러나 성숙의 일에 대 해서는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경순은 창수의 학비에 대한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어떻게 말을 내어야 옳을는지 몰라서 주저하였다. 경순 어머니도 경순이 무슨 말을 할 듯하면서도 조금 어려운 빛이 있는 듯 한 눈치를 채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잠잠하였다.
"어머니, 저 만주로 간다고 야단이에요."
하고 경순은 밑도 끝도 없이 말을 내었다.
"만주로 가다니, 누가?"
하고 경순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심스럽게 묻는다. "집에서 그런답니다."
"사위가?"
"예."
"만주로 간다고?"
"예."
"만주는 왜?"
"돈 벌러 간다나요."
"돈 벌러? 만주 가서 어떻게 돈 벌어?"
"모르지요, 어떻게 벌려는지. 아무 짓이라도 하여서 번다니까." "만주로 돈 벌러 갔다가 고생만 죽도록 하고 빈털터리로 온 사람이 많다더라. 그리고 까딱하면 귀신 모르게 죽는다 더라. 죽이나 밥이나 되는 대로 먹고 살지, 그런 데를 가서 무얼 하니, 누구를 또 가슴 아프게 하려고."
하고 경순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기에 말이에요. 저도 그런 말을 하였는데 어디 듣나요. 공부를 더 해야겠는데 학비가 없다구요. 아무리 하여도 아니 되니까 어쩌는 수 없이 만주로 가서 무슨 노릇이라도 하여서 돈을 벌어야겠다구요. 그런데 아편 장사를 하든지, 하다못해 노동이라도 한다나요. 그래 부랴부랴 간다고 그런 답니다."
하고 경순은 어머니를 본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한다고?"
"누가 아나요. 일본 가서 대학교를 마친다나요."
"학교를 안 다닌 사람도 제 복 있으면 잘 산단다. 공부를 그만큼 했으면 무던하지 또 해서 뭘하니. 돈이나 있으면 모 르지만 돈도 없는데."
"대학교를 마쳐야 취직을 하여서 벌어먹게 된다구요. 졸업 을 하면 그 이튿날부터라도 돈을 벌게 된다나요."
"이애, 그런 소리 듣기 싫다. 대학 공부를 하고도 아무것도 못하고 펄펄 노는 사람이 부지기수란다.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다 벌어먹게 되면 그 돈을 다 누가 준다더냐. 하기 야 일본이나 서양을 가서 대학교를 마치고 오면 한몫 놓아 주나 보더라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할 말이지. 그렇고 그런 데 가서 공부를 하고 오면 양옥을 짓고 연애를 한단다. 연 애가 무엔지 그것만 하면 장가든 것도 쓸데없고 본처도 쓸 데없단다. 그래서 그런 데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의 아내는 낙방(落榜)거지가 된 사람이 많다더라."
하고 경순 어머니는 자기가 들은 대로 누구누구의 예를 들 어서 해외에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으로 이혼한 사람과 첩 얻은 사람을 섬기면서, 마치 그런 데 가서 공부한 사람은 다 허영에 뜨는 부랑자가 되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게야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다 그럴라구요."
하고 경순은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처럼 조심성 있는 빛을 띤다.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지반 다 그런가 보 더라. 이런 데서는 관계찮던 사람도 그런 데 가서 공부를 하고 나오면 마음이 변해진다더라. 네 남편도 지금은 얌전 하다고 하지마는, 그런 데 가서 공부를 하고 오면 마음이 변하여서 너를 고생시키게 될는지 누가 아니?"
하고 경순 어머니는 일시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진심으로 하는 태도를 보인다. 경순은,
"에구 어머니두, 설마 그럴라구."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는지도 모르게 생각되었다. 그러 나 창수가 졸업을 하고 온 뒤에 자기를 배척하게 될는지 안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것은 장래의 일이 요, 우선 자기 어머니에게 학비를 변통하여 주지 아니하면 당장에 창수와의 정의 가 성기게 될 것을 짐작하여서, 다른 할 만한 일을 생각할 여유도 없고, 또는 자기 어머니의 말 이 너무 과도하여 반드시 그러리라고 다 믿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경순이 처음부터 자기 어머니에게 창수의 학비 에 대한 말을 차마 하기가 어려운 것을 깨달아서, 말이 거 기까지 이른 것도 적지 아니한 미안을 품었었는데, 자기 어 머니의 관찰이 잘 되고 못 된 것은 딴 문제로 하고라도, 그 렇게까지 미치는 바에는 그 이상 더 말할 용기가 나지를 아 니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은 정히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사람의 마음은 아무리 안으로 숨기려고 하여도 반드시 밖 으로 나타나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보다도 숨기려고 할수록 더욱 나타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말하려고 하면 서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애처로움 마음이 경순의 얼굴빛을 거쳐서 경순 어머니의 눈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핏줄이 같은 모녀간에는 한 사람의 정신이 움직일 때에 다른 한 사 람의 심령이 고요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경순 어머니는 경순의 태도가 눈에 거리끼고 마음에 켕겼다.
"그래 만주 간단 말만 하고 다른 말은 없디?"
하면서 웃는 경순 어머니의 얼굴은 흐렸다가 개이는 일기 처럼, 불쾌한 빛이 거치는 흔적을 따라서 평화스러운 빛이 퍼진다.
"다른 말도 있어요."
하고 경순은 해 저물고 길 끊어진 막다른 곳에서 한 줄기 의 길을 찾은 것처럼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디?"
하는 경순 어머니의 태도는 너그럽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귀여운 어린 딸을 달래듯이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 러나,
"저……"
하고 다시 말문이 막히는 경순은 모든 표정이 다시 무거워 졌다.
"그래 무슨 말이냐? 어서 해라, 무슨 하기 어려운 말이냐?
그리 주저하게."
하는 경순 어머니는 마음을 가벼운 듯하면서도 다소 의심 스런 눈으로 경순을 본다. 그래도 조금 주저하다가 새로운 용기를 내는 듯이,
"돈 말을 어머니에게 해보라고 그래요."
하고 경순은 기쁘지 아니한 웃음이 흐르는 입술보다도 약 간 붉어지는 얼굴을 왼쪽으로 틀면서 조금 숙인다. 그것은 자기 어머니에게 돈에 대한 말을 하기 어려운 것뿐이 아니 라, 사랑하는 자기의 남편을 위하여 아끼고자 하는 잔부끄 럼과, 아무리 흉허물이 없는 어머니에게일지라도 자기 남편 의 구차스러운 말을 하기에는 조금 창피스러운 생각이 없을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돈 말을?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고 경순 어머니의 기색은 조금 달라진다.
"공부할 동안 학비를 좀 당해 주시면 졸업한 뒤에는 곧 갚 아 드린다구요. 그런데 그도 꼭 어머니에게만 변통해 달라 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만주로 간다고……. 간대야 돈을 벌 른지 못 벌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첫째로 위태하다니 즉 가지 말라고 하니까, 그러면 어머니에게라도 말씀을 해서 변통이 되면 아니 가겠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거저 쓰는 것 이 아니라 졸업한 두에는 도로 갚아 준다니깐. 그러나 나중 에 갚아주게 될는지 안 될는지야 누가 알아요. 하자면 돈 벌러 간다고 만주로 가면 사람의 일을 어떻게 될는지 알아요. 하니까 저도 어머니 성미를 알면서도 말씀을 하는 게지요. 공연히 딴 일이 생겼어요, 에구 참."
하는 경순은 걱정스러운 빛이 온 얼굴을 덮었다.
"그래 예서 돈이 안 되면 꼭 만주로 간다고 하더냐?"
"꼭 간다고 하고말고요. 여기서 안 되면 간다는 것이 아니 라 당초부터 간다는 것이에요. 공부도 못하고 살면 무엇을 하느냐고, 만주로 갔다가 죽어도 좋다고 하던데요. 에구 무 서워라, 말만 들어도 끔찍스러운데."
하는 경순은 몸을 움츠리면서 무서워하는 자세를 짓는다.
"그래 만주로 가면 혼자 간다든, 너하고 같이 간다든?"
"아니에요, 혼자 간대요. 제가 말을 해 봤어요. 그런 데를 가면 나는 혼자 살 수가 없으니 같이 가겠다고 그러니까, 그런 데는 같이 갈 수가 없는 형편이라고, 혼자 간다고 그 래요."
근심스럽게 말하는 경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순 어머니 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러니, 그런 데를 가면 어찌 될는지는 모르고 또는 돈을 번다 할지라도 몇 해가 걸릴는지 모르는데, 그러면 우선 네 고생이 적으냐. 하기야 내게 와서 같이 있더라도 먹고 입는 것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라……"
하고 다시 말을 멈추고 조금 있다가,
"어지간히 쓰면 백 원 이상을 쓰고 아무리 작게 써도 오륙 십 원은 가져야 된대요."
경순은 어머니의 말에 적이 광명을 얻은 듯하였으나, 돈의 액수를 말하기에는 너무도 많다는 생각으로 다시 걱정스러 운 빛을 띠었다.
"오륙십 원! 한 달에 오륙십 원?"
하고 놀라면서 눈을 크게 뜨는 경순 어머니는,
"나는 평생을 살아도 한 달에 오륙십 원을 벌어도 못 보고 써도 못 보았다. 너 시집 보낼 때 쓴 것은 말할 것 없고, 한 달에 오륙십 원이면 일년에 얼마냐? 한달에 오십 원만 치더 라도 열 달에 오백 원하고 두 달에 백원, 일 년에 육백원 돈이로고나, 그래 공부는 몇 해나 해야 된다디?"
"삼사 년, 아마 한 사 년 있어야 된다나 봐요."
"사 년! 그래 한 달에 오십 원씩 사 년이면 얼마냐?"
하고 구구를 쳐서 도합이 얼마인지를 알아보려고 하는 경 순 어머니는 마침내 따지지 못하고,
"에구, 그것 조선은행이나 가진 사람이나 할는지, 여간 사 람이 그 뒤를 대겠니. 논마지기 있는 것을 다 팔아도 될까 싶지 않다."
하고 걱정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서글픈 웃음을 웃는다.
"어머니, 많기는 많아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것이 한 꺼번에 내는 것이 아니라 다달이 내는 것이니까, 일 년에 육백 원이면 우리 추수의 반만 팔아도 되기는 돼요. 작년에 도 우리 양식 갖다 먹고서도 추수한 것이 일천 삼백 원이 넘었으니까, 반만 해도 육백 원이 되지 않아요?"
하는 경순은 눈을 깜짝이면서 어머니를 본다.
"그러냐?"
하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경순을 보는 경순 어머니는,
"그렇지만 너는 판 돈 생각만 하는구나. 그걸 가지고 구실 물고, 가옥세니 무어니 모두 물고 나면 얼마 남니? 그렇고 요새는 곡가가 조금 올라서 그만이나 하지, 곡가가 털썩하 는 날이면 말 아니다. 비싼 세금을 물고 나면 양식할 것도 변변치 않은데, 육백 원 돈을 어디서 빼내겠니. 너는 살림을 해보지 아니하여서 그런 것은 다 모른다."
하면서 작년의 세금 문 것과 가용 쓴 것을 대강 쳐보더니, 추수 판 돈이 얼마 남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글쎄, 나도 어머니보고 억지로 학비를 대어 주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는 말이지. 그러나 딱한 일이 아니우? 만주 같은 데로 가버리면 어찌 될는지도 모르고, 내야 혼자 있어 도 관계 없지만."
하고 경순은 시름 없이 말을 하고 한숨을 지우려다가 들이 쉬지는 않는다. 경순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한참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지으면서,
"그도 그렇다. 만주 같은 데를 가면 어찌 될는지도 모를뿐 아니라, 몇 해를 두고 아니 오면 그 사이에 네가 혼자 있을 걱정하는 것도 볼 수 없는 일이요, 그뿐 아니라 우선이라도 나에게 돈 말을 하였다가 아니 되면 나를 얼마나 섭섭히 생 각하겠니. 나를 섭섭히 생각하면 너까지도 그 엉얼을 입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팔자가 사나와서 소년 과부로 이 때까지 고생을 하고 살았지마는, 만일 네가 내외간에 어떻 다 하면 내가 그 꼴을 어찌 보겠니. 그러니까 논마지기가 다 없어지더라도 학비를 대어주자. 나야 다 늙어서 오래잖 아 죽을 터인데 굶으나 먹으나 상관 있나. 너희들 내외나 잘 사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아야지. 내가 아무렇기로 돈을 아껴서 너를 걱정되도록 하겠니. 내가 돈을 모아서 무엇을 하니. 너 때문에 아둥바둥 돈푼이나 모은 것이지, 그렇지 아 니하면 내가 무슨 청승으로 바느질품을 팔아 가며 반찬 하 나 못 하 먹고 남과 같이 옷 한 가지 변변히 못 해 입고 돈 을 모은단 말이냐. 내게 있는 논마지기나 돈냥 있는 것은 다 네것이다. 내가 그것을 관 속에 넣어 가겠니. 나는 아무 쪼록 돈푼이나 더 모았다가 내가 죽을 때에 오스름히 너를 주어서 먹고 살도록 하렸더니, 그리 되지 않는 것이 조금 섭섭하지마는, 그역 어쩌겠니. 인력으로 못하는 일이다. 지 금 와서는 네 남편 주는 것이 너 주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 이 아니냐. 조금도 이를 안 주겠니. 그래 언제 단다디? 오늘 이라도 돈을 가지고 가려거든 가거라. 은행에 맡긴 돈이 천 원이나 있다. 너도 같이 가서 맡기지 않았니? 왜 조금도 맘 상하지 마라. 내가 누구를 바라고 산다고 네 맘을 상해 주 겠니."
하고 경순을 보는 그는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이 한다. 어 머니의 말을 잠착하여 듣고 있던 경순은 홀연히 눈자위가 붉어지면서 눈물이 핑 돈다. 속으로 느끼는니 말을 하지 못 하고 한참 있다가,
"어머니! 나는 무얼로 생겨서 어머니에게 애물 노릇만 하우. 어머니는 이리 잘난 것을 이때까지 길러내느라 고생하 시고, 시집이라고 간 것이 또 어머니의 걱정을 시키게 되니, 까마귀도 부모의 은혜를 갚는다는데, 저는 커서도 어머니의 뜻을 한 번도 편안히 해 드리지 못하고, 까마귀만도 못한 인간이 살아서 무얼 하우. 아마 내가 전생에 어머니에게 무 슨 죄를 지었던 게지. 어머니,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사람 이라고 살고 싶지도 않아. 어머니가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 을 쓰시려면 가슴이 여북 쓰르겠오. 그것도 다 내 죄지 무 에요. 나는……."
하고 말을 마치지 않는다. 경순은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닦으려고 아니하고 수건으로 눈을 가린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소리를 왜 하니. 내가 누구 때문 에 살아 있는 줄 아니? 너 때문에 살아 있다. 나는 늬 아버 지가 돌아가신 뒤에 몇 번이나 늬 아버지 뒤를 따라가려고 망설이다가 너 때문에 차마 못하였다. 세상 일이 모두가 괴 롭지마는 너 하나에 재미를 붙여 가지고 살았다. 그러니까 이야기마다는 네가 아홉 살인가 되는 여름이다. 하도 괴로 운 중에 잡것들은 좋은 자리가 있으니 시집을 가거라, 어찌 거라 하는 별의별 소리를 다 하는데, 하도 분하고 원통하여 서 죽기로 작정하고 한강 철교로 나갔더니라. 그때 자정이 나 되어서 인적이 고요하기에 난간을 붙들고 막 떨어지려고 하는데, 별안간 네 울음 소리가 나더구나, 그래 깜짝 놀라서 네가 행여 내 뒤를 쫓아왔나 하고 사방을 돌아보아야 아무 것도 없기에, 다시 덜어지려고 하니까 또 네 울음 소리가 금방 곁에서 나는 것처럼 들리더구나. 그래 또 돌아다보아 도 아무도 없구나. 하기야 네가 집에서 울었다 한들 그 소 리가 거기까지 들리겠느냐마는, 아마 마음에 씌워서 그리 들린 것이지. 그래 죽을 생각은 없어지고 네 생각이 나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사지가 떨리더라. 그래 불현듯이 집으로 오려니 전차가 끊어졌지요. 그래 하는 수 없이 두 주먹을 부르쥐고 달음질을 쳤다. 그래 아무리 빨리 오느라고 와도 자꾸 걸음이 뒤로 물러나는 것 같고 속히 와지더냐 어디.
그래 오다가 발이 아파서 올 수가 없기에 고무신을 벗어 들 고 버선발로 왔다. 그러니까 혹시 누가 보면 할 일없이 미 친년 같지. 그러거나 말거나 허둥지둥 집에 와서 보니 온몸 이 물에 빠진 것처럼 땀이 나서 흠뻑 젖었구나. 그래 숨도 돌릴 새 없이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여다보니, 네가 그대 로 누워서 홑이불을 발로 차내버리고 쌕쌕 자고 있더구나.
그래 나는 그대로 네 옆에 주저 앉아서 눈이 붓도록 우렀다. 그러노라니 동이 훤히 트더라. 그러고 나서는 며칠을 앓 았는지 모른다. 너는 그런 것을 다 모르지마는 나는 그렇게 세상을 지내었다."
하고 경순 어머니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목이 메는 덧이 조금 진정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니 그때만 해도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한강의 물귀신 이 되었을 것이 아니냐. 너 때문에 모진 목숨을 구차히 살 아 가지고 있지, 너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공동 묘지에 가 서 흙이 되었던지, 화장장에 가서 재가 되었던지, 물에 가서 고기밥이 되었을지 모른다. 모든 일이 귀찮고 괴로워서 당 장에 죽고 싶다가도, 눈앞에서 곰실거리는 너를 보면 사랑 스럽고 불쌍하여서 모든 마음이 봄눈 슬듯 하는구나. 그래 서 이때까지 산 것이다. 그리고 돈냥을 모은 것도 그게 다 네 복이다. 내가 무슨 복에 돈냥이 내게 태였겠니. 내가 손 톱만큼이라도 복이 있으면 늬 아버지 같은 이를 이별하고 소년 과부가 되었겠니. 내게 있는 재물이 다 네 것에 태인 덧이다. 네 복으로 생긴 재물 네 맘대로 쓰는 것이지, 나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리고 네가 저만큼이나 장성해서 시집 까지 갔으니, 나야 지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니. 조금도 다른 생각 말고 네 맘대로 해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 지지만, 그래도 그런 소견은 있단다."
하는 경순 어머니의 태도는 적이 화평한 듯하면서도 비장 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말이 없이 머리를 어머니의 무 릎에 대고 흑흑 느끼는 소리가 났다.
경순을 친정에 보내고 혼자 앉아서 생각하는 창수는 마음 이 편안치 못하였다. 혼자 사는 장모에게 학비를 청구하는 것이 원래 쾌쾌한 일이 못 되는 중에, 그나마 자기가 직접 으로 말하지 못하고 다소의 술책을 써서, 아내로 하여금 청 구하게 한 것이 더욱 사내답지 못한 일이요, 그나마 되며는 다행이지마는 되지 못하는 때에는 얼마나 창피한 일인다.
그러나 자기 장모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될 것 같지 않지마 는, 경순이 진정으로 성의 만 쓰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것은 자기의 장모가 아무리 돈에 대하여 인색하다 할지라 도, 돈보다 무남 독녀 외딸 경순을 더욱 사랑하는 것을 아 닌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학비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 기 장모의 인색한 탓이 아니라, 경순의 성의가 부족한 까닭 이어서, 학비의 되고 안 되는것은 경순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니하는 데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창수 는 학비의 되고 안 되는 일에 대하여 궁금한 것보다, 아내 의 사랑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궁금하였다. 잠 깐 다녀오겠다고 하던 경순이 조금 늦은 것을 보고서, 일이 잘 되었으면 곧 올터인데 되지 아니하니까 늦게 오는 것이 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지마는, 당초에 될 가망이 없으면 속 히 올 터인데 되도록 만드느라고 아니 오는 것이라고도 생 각할 수가 있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정히 갈피를 잡을 수 가 없었다.
그러자 마침 들어오는 경순을 보는 창수는 반갑기도 하였 으나 한편으로는 염려도 되었다. 그리하여 경순의 말을 듣 기 전에 먼저 경순의 얼굴빛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눈물의 흔적을 겨우 감춘 경순의 얼굴에는 그다지 즐거운 빛은 없 었다.
? 아마 틀린 게로군.' 하는 혼자 생각으로 경순의 입만 쳐다보는 창수는,
"기다리셨지요?"
하는 경순의 말에,
"기다리기는 무엇을 기다려, 모처럼 갔으니까 으레 늦을 줄 알았지."
하고 경순의 뒷말을 기다린다. 옷을 갈아 입고 천연히 앉 는 경순은,
"동경은 가시면 언제쯤 가세요?"
하고 묻는다.
"대관절 학비가 되어야 가든지 오든지 하지요."
"학비가 되면 말씀이에요."
"학비가 되면 곧이라도 가야지요. 입학이야 봄에 하게 되겠 지만, 미리 가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될 테니까요. 그런 데 대관절 학비는 어찌 되었소?"
하고 창수는 조금 갑갑한 듯이 묻는다.
"학비는 됐어요."
하는 경순의 말은 소리 없는 웃음과 섞여 나온다.
"되었어?"
하고 창수는 의외인 듯이 다시 묻는다.
"예. 되었어요."
"아마 경순씨가 힘을 매우 쓴 거로군."
하고 창수는 웃는 눈으로 경순을 본다.
"아니어요, 말씀을 하니까 대번에 응낙하시던데요."
하는 경순의 수월한 말에,
"그 어른이 그렇게 활수시든가?"
하고 혼잣말처럼 하는 창수는 의심스러운 빛을 띤다.
"어머니는 여자라도 그렇지 않으세요. 안 쓸 데는 한 푼이 라도 안 쓰시지만, 쓸 데는 얼마든지 아끼지 않고 쓰시는 성미세요."
하고 경순은 어머니를 위하여 변호하였다.
창수가 처음에는 아무쪼록 경순의 마음을 움직여서 학비를 도둑하려 하였고, 경순이 학비를 말하기 위하여 친정에 간 사이에도 이리저리 스스로 추측하면서 공연히 마음이 불안 하였으나, 급기야에 아무 지장이 없이 학비가 되었다는 때 에는 자연히 마음이 부끄러운 듯하면서 경순의 모녀에게 미 안하였다. 그리하여 학비가 되더라도 그렇게 순순히 되지 말고 다소의 승강이를 하다가 어렵게 되는 것이 오히려 자 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할 듯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너무 미안한 일이요. 경순이 낯을 보아서 승낙하셨 겠지마는, 그래도 규모 있는 부인네 마음에 끼이지 아니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나중에 갚아 드리기는 하겠지만."
창수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내 낯을 보아서 승낙하셨다고? 그 어른이 아들도 없고 하니까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아시우. 당신의 공부하는 일이니까 두말 없이 승낙하셨지, 오히려 내가 쓴다면 아니 주실 게요. 그리고 나중에 갚는다 던라고 하니까 껄껄 웃으시면서 갚는 것이 다 뭐냐고 그러 시던데요. 그렇게 생각 마세요. 우리 어머니는 늙어서도 당 신밖에는 믿을 데가 없으시지 아니하우. 이 다음이라도 친 어머니처럼 여기셔야 됩니다."
하는 경순은 그 기회를 타서 자기 어머니의 괴로운 정경을 은연중 부탁하였다.
"낸들 그런 생각을 못하겠소마는, 우선은 걱정을 시키니까 미안한 일이오."
하는 창수의 말은 순전히 양심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런 생각 마시고 공부나 잘 하세요. 그리고 공부하시고 돌아오시거든 우리가 얼머니를 모시고 지낼 도리를 하세요.
그래 당신이 버는 것을 가지고 내 손으로 소금밥이라도 하 여서 어머니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을 좀 해보게요. 나는 이때까지 어머니의 사랑만 받고 걱정만 시켰지, 조금도 내 손으로 봉양을 못해 보아서 그것도 원이 되어요."
하는 경순은 창수의 유학 가는 데 대하여 진심으로 많은 기대를 가진다.
창수는 이듬해 봄의 입학기에 간대도 늦을 것이 없지마는 어쩐지 부득부득 속히 떠나기로 하였다. 경순은 창수를 따 라가고도 싶었다. 결혼한 지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새로 운 정이 흡족하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지마는, 객지에 가 있으면 의복이나 음식이 다 맞지 못하여서 창수에게 고 통이 될 듯싶으므로, 잘하나 못하나 자기의 손으로 정성껏 하여서 창수의 공부하는 뒷바라지를 하여 주고 싶었으나, 그러노라면 비용도 더 들게 되어서 어머니의 걱정을 더 시 킬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듣기만 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외국의 사정을 아 수도 없어서, 따라가고 싶은 외로운 생각 은 오직 괴로운 듯한 작은 가슴으로 고요히 품어 주고 말았다. 창수가 떠나게 되는 때에는 집안의 형편이라든지 경순의 생각과 자기의 소견을 종합하여서 경순은 친정에 가서 있게 하였다. 창수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던 때는 동짓달 어느 날의 첫눈 오던 아침이었다. 경성역의 플랫포옴에서 싸이렌 소리의 남은 메아리가 다하기 전에,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경부선 열차를 보내는 경순은 손으로 수건 을 흔들 줄도 몰랐으므로, 작은 새의 그것과 같은 보드라운 마음은 스스로 흔들렸다.
기차를 전송하는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었다. 모자를 벗어들 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 수건을 흔드는 사람, 돌아서서 우는 사람, 웃고 떠드는 사람, 시름없이 서서 가는 기차를 바라보 는 사람…… 실로 형형색색이었다. 그러한 광경을 처음같이 보는 경순은 심사가 어리둥절하여서, 창수를 보내는 회포보 다도 그러한 것을 구경하는 감상이 더욱 정신을 끌었다. 사 람의 세상이란 이러한 것인가? 정거장이라는 것은 참 이상 한 곳이다 싶어서, 활동 사진이나 신소설에서 보는 것보다 도 영화해설(映?解設)이나 야담(野談) 같은 데서 듣던 것보 다도 더욱 이상하였다.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방면으로 가 는 사람들이건마는, 그들의 사정이 그다지도 다 각각 다를 까, 혹은 보내는 사람들의 정경이 달라서 그러할까, 창수가 유학의 길을 떠나는 것은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건마는, 보 내는 자기로서는 견디기 어려울 만한 회포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여 보면, 가는 사람보다 보내는 사람의 사정이 다 각 각 다른 듯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쁜 길로 떠나는 창수일 지라도, 자기를 떨치고 가는 회포가 자기가 창수를 보내는 회포 이상으로 더욱 괴로운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 게 생각할 때에는 자기가 창수를 그리는 것보다 창수로 하 여금 자기를 그립게 하는 것이 더욱 괴로웠다. 하여간 사람 의 이별이라는 것이 통틀어 이러한 것인가 생각할 때에, 인 간 만사가 족히 믿을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경순은 무슨 인생관을 깨달은 듯이 울고도 싶었으나, 또한 족히 울 것도 없는 듯하였다.
"언니는 울지도 아니하우?"
하고 뒤에 따라오던 창옥이가 바싹 다가서면서 말을 한다.
"울기는 왜 울어."
경순이는 창옥을 돌아보면서 심상한 듯이 대답한다.
"울기는 왜 울다니? 오빠 떠나시는데 말이요."
"오빠 떠나시는 데 왜 우느냔 말이여? 울 일이 무에 있어서." 모르는 체하고 말하는 경순은 눈을 속이로 끔적였다.
"울 일이 무에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언니는 야멸차 기도 하시오, 오빠는 가시면서 자꾸 우실 터인데."
하고 창옥은 눈을 치뜨고 경순을 본다.
"오빠가 또 왜 우실까? 유학을 가시노라고 좋아서 가시는데." "그런 공 없는 소리 말아요. 오빠는 그렇잖아요. 오빠는 언 니 생각을 하고 눈이 붓도록 우실 텐데, 저것 좀 보아요. 남 들 우는 것 좀."
하고 손가락으로 경순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면서 플랫포옴 의 기둥을 붙들고 서서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우는 젊은 여 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저렇게 좀 울어요. 그러면 내가 오빠에게 편지할 때에 언 니가 정거장에서 오빠를 못 잊어서 울더라고 할 터이니, 그 러면 나중이라도 오빠에게 사랑을 더 받지 아니하우."
하고 조롱 비슷이 말을 하고 웃는다.
"듣기 싫어요. 누가 그런 소리 하래나."
하는 경순은 창옥의 눈을 피하여 가면서 용산 쪽을 바라보 았으니 기차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경순은 소리 없이 한 숨 을 내쉬면서,
"기차는 벌써 멀리 갔구나."
하고 다시 창연한 빛을 지었다.
「…….우리의 떠난 지가 벌써 사흘이 되었습니다. 시간으 로는 사흘에 지나지 않지마는, 몸은 그야말로 산 설고 물 선 만리 타향에 있게 되었습니다. 경 성역에서 떠나서 여기까지 이르기 육로로 수로로 여러 천리 를 오는 동안에, 보지 못하던 산천 풍물을 구경하기에 심사 가 새로울 듯도 한 일이요. 차에서 배에서 적지 아니하게 피곤도 하였건마는, 어쩐지 그렇다고 하여서 마음이 상쾌하 고 기쁘다든지, 또는 혼곤하게 잠을 자 본 적은 한 번도 없 습니다. 그러면 새로 보는 모든 풍경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못하고, 머나먼 길의 피곤한 것이 나로 하여금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나는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잠착하여 생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새로 운 생각이 아니라 경순이를 생각한 것이요.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눈을 감고 누운 때가 있다면 그것은 잠이 아니라 꿈 이었습니다. 몸은 차에 아니면 배에 있었고, 배에 아니면 차 에 있지마는, 꿈은 언제든지 집에 있었습니다. 같이 있는 것 은 여러 나라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마는, 꿈은 언 제든지 경순이의 곁에 있었습니다.
경순이! 경순이는 애인으로, 아내로 지금은 나의 은인이 되 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한갓 사랑만으로 경순이를 갚은 것 은 부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공부를 힘써 하는 것 으로, 나중에는 진정한 사랑과 성의로 경순이를 갚는 것이 인정이라고 하느니 보다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순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참아 주세요.
나는 동경이 초행이라 모든 것이 서툴러서 불편할까 염려 하였더니, 동경역에 내려서부터 최 성숙씨의 친절한 알선으 로 조금도 불편한 것이 없사옵고, 여관도 잘 정하였사오니 다행이외다. 편지는 종종 하겠사오며 대강 그치나이다.」
경순은 며칠 후에 창수의 이러한 편지를 받았다. 경순은 남편에게서라도 이러한 편지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더 구나 처음같이 작별한 뒤의 일이라, 그러한 편지가 더욱 신 기하여서 적지 아니한 충동을 받았다. 경수는 그 편지를 보 고 또 보고 몇 번이나 보았다. 그리하여 청수가 자기를 그 처럼 사랑하고 감사한다는 데 대해서는 순진하고 단순한 경 순으로는 그것을 끝없이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리하여 그 편지를 몇 번이나 입술에 대기도 하고 가슴에 껴 안기도 하였으나, 다만 그 편지가 온 데에 성숙의 말이 있 는 것은 한편으로 몹시 섬찍하고 꺼림칙하였다. 더구나 성 숙이 창수에게 친절히 하고 편의를 도와 주어서, 창수가 성 숙을 감사하게 여긴다는 데에는 무슨 시기도 아니건만 공연 히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괴로왔다. 경순은 창수에게 답장 을 하려고 여러 번 붓을 들었으나 마침내 쓰지는 못하였다.
대관절 허두는 무어라고 할 것이며, 사연은 어떠한 순서로 어떻게 써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수를 작별한 후부 터 만일 편지를 하게 된다면, 생각에 있는 말을 다 쓸 뿐 아니라 평일에 말로 하지 못하던 일까지 쓰려고 하였고, 또 는 사연도 어찌어찌하리라는 것까지 대강 마음으로 초(草)를 잡았던 것이어서, 편지를 쓰려고 할 때에 우선 전일에 생각 하던 바를 다시 마음으로 외어 보았다. 그러나 급기야에 붓 으로 쓰려고 하는 때에는 마음으로 생각하던 바와는 딴판으 로 되지를 아니하였다. 생각을 가다듬고도 못 써서 찢고 찢 고 하였다. 아무리 편지 같은 것을 별로 써보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그저 안부만 묻는다든지 무슨 일에 대한 사연만 쓴다면 그다지 못 쓸 것도 아니지마는, 자기가 창수를 사랑 하는 정경이든지 또는 창수를 그리는 회포를 쓰려고 하는 때에는, 생각이 간절할수록 붓은 멈춰졌다.
「떠나신 후에 소식 묻자와 궁금하옵던 차에, 글월을 받자 오니 감사하오며, 육지로 바다로 머나먼 길에 안녕히 득달 하셨다 하오니 감축하오며, 다시 묻잡는 말은 하도 먼 길이 라 차에서나 배에서나 멀미나 없으셨으며, 득달하신 후로 여독(旅毒)이나 없으신지요?
이곳은 어머니 모시고 무사하오며 시댁도 안녕하시온 중, 창옥씨가 떠나실 때 정거장에 나갔다가 감기가 들어서 조금 앓는 중이오나, 대단치 않사오니 걱정하지 마옵소서. 편지 사연 중에 은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 사오나, 아마 학비에 대한 말슴인 듯하외다. 그러한 그 일로 하여서 저를 은인이라고 하신 것은 실로 부끄러운 말씀이외다. 그 돈으로 말씀하면, 저의 돈도 아니거니와, 가령 저의 돈이라 할지라도 남편으로서 아내의 돈을 쓰는 것이 무슨 은혜스러울 것이 있습니까? 지금의 사람들은 내외간이라도 돈에 이르러서는 한 푼을 다툰다고 하고, 또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지마는, 무식하고 미련한 저로서는 그러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의 몸이나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은 없을 겁니다. 돈이 아무 리 중하다 할지라도 몸이나 목숨보다 더 귀중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듣자오니 부부라는 것은 오륜 삼강에 드는 것으로, 여자로서 남의 아내가 되는 때에는 자기의 몸 과 목숨까지라도 다 남편에게 바치는 것이온데, 그러면 가 장 귀중한 몸과 목숨을 바친 아내로서 돈만을 따로 가지고 있어서 한 푼 두푼을 다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우 리 나라의 예법에는 어그러지는 듯합니다. 하물며 저의 돈 도 아니고 어머니의 돈인 바에야, 저에게 대하여 은인이라 는 말씀이 가당이나 하오리까. 그러한 생각을 조금도 마시 고 아무쪼록 공부나 잘 하시고, 영광스런 몸으로 돌아오셔 서 의지할 데 없는 저의 어머니까지라도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경순은 몇 번이나 고치고 전줄러서 이렇게 써놓고 여러 번 읽어 보았다. 마음에 흡족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이상 더 잘 쓸수가 없어서, 그대로 보내려고 봉투에 넣고 생각하니 그 만하면 할 말을 대강 되었으나 사랑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없었다. 평일에 창수를 사모하던 것이라든가, 작별할 때에 너무 섭섭하였고, 그 후부터 낮과 밤으로 그리워서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운 정상을 편지로나마 한 번 하여 보겠다 고 벼르고 벼르던 나머지인데, 급기야는 편지를 하게 되는 때에 그러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구 식 예의를 숭상하는 경순으로도 마음의 어느 구석이 심히 결연하였다.
「당신이 떠나신 뒤에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잃어버리다 못하여 나의 마음까지도 잃어버린 것 같습 니다. 왜 그런지요? 어머니를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외롭기 도하고 희뜩희뜩하여서 어떤 때에는 울 듯도 하여요. 왜 그 런지 모르겠어요. 짧은 해를 길게 보내는 수도 있지마는 긴 밤을 짧게 새는 때도 많습니다. 마음이 이상도 하여서 걷잡 을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시는 동안이라도 휴가 때에는 다 녀가실 수도 있겠지요. 휴가 때에는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 리고 너무 곤란하게 지내지 마시고, 학비가 부족하거든 종 종 기별하여 주세요. 힘 자라는 대로는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고추장과 배추김치가 없다기에 운송부로 조금 보내오니 받으시고, 다음이라도 기별 하시면 또 보내 드리겠습니다. 편지 쓰는 격식을 몰라서 귀둥대둥 썼사오니 눌러 보시기를 바라나이다.」
경순은 다시 딴 종이에 이렇게 써서 이중 봉투에 동봉하고 우표를 반듯이 붙여서 가회동의 우체통에 넣으려다가, 그것 이 미심스러워서 안국동 우편소에까지 가서 등기로 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