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後悔) · 한용운

Chapter 2: 2

창수는 취운정(翠雲亭) 어귀를 나서서 바로 재동 네거리로 나오려다가, 다시 머뭇머뭇하더니 어느 전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로 자동차를 불렀다.

"자동차는 왜 불러? 조금 가다가 전차 타면 그만인데."

"글쎄 말이야."

이렇게 서로 말하는 경순과 창옥은 길의 한편으로 비켜 서 서 끊임없이 무슨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어느 겨를에 자동 차는 와서 그들을 싣고 경성역에 이르렀다.

정거장에는 습율 대회에 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은 신문사에서 가는 것으로 영솔하는 사람과 기자, 사진사 등 몇 사람을 제하고는 전부가 여자였다. 그들의 의복과 행 장과 모든 차림차림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들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는만큼 될 수 있는 대로 모양을 내었다. 그 중에는 밤줍기에도 편리하고 여흥(餘興)에도 한몫보려고 일 부러 수수하게 차린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러 한 여자는 몇 사람이 못 되었다. 그들은 왔다갔다하며 아는 사람끼리 이야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의 인사 소개도 하고, 서로 찾고 부르고 야단법석이었다.

"이게 얼마만야."

"이런 데서야 만나 보겠군."

"그런데 아주 몰라보게 되었어, 어쩌면."

"어린애를 낳고, 게다가 부엌데기 노릇을 하니까 그렇지.

아주 모양 없이 되었지?"

"아니야. 그런 의미로서가 아니라,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이야. 발육이 대단히 피었는데."

"인사 소개나 좀 할까. 이분은 숙명(淑明) 출신으로 동경가 서 사범(師範)을 마치고 지금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이 ○○씨."

"이분은 한참 스크리인의 여왕이라고 하던 인기자로서, 지 금은 현모양처가 되신 박 ○○씨."

"이번에는 밤을 좀 많이 주워야 할 텐데. 작년에는 아주 못 주웠어."

"나는 밤을 줍는 것보다도 여흥에 일등상을 타야겠어."

"에그, 나는 그런 것보다도 친구 만나기 위해서 나왔어. 이 런 기회가 아니면 여러 친구를 만나 볼 수가 있어야지."

"에그, 나는 점심을 싸놓고도 잊어버리고 나왔어."

이러한 말들로 유난히 수선을 떠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들 은 거의 전부가 신여성들로, 모든 행동이 쾌활한 듯도 하였 지마는, 그보다도 경박한 편이 많고 친절한 듯하면서도 수 다한 편에 가까웠다. 별로 이유도 없이 자기 예쁜 것을 드 러내려고 하는 것이 여자로서의 본능이라면 그들은 더욱 그 러한 듯하였다. 그들의 웃고 말하고 고요하고 움직이는 모 든 것이, 다 다른 사람들의 예쁘게 여김을 받으려는 애교의 동작 같이 보였다.

창수는 그들과 경순을 비교하여 보려고도 아니하였으나 자 연히 다른 점을 보게 되었다. 경순이 천연적으로 타고난 얼 굴의 예쁜 것과 태도의 아름다운 것으로서의 다른 것은 말 하지 말고라도, 쪽찐 머리에 긴 치마를 입고 솜버선에 고무 신을 신은 것이라든지, 천연하고 침착한 중에 알지 못하게 나타나는 수줍어하는 기색이, 어디로 보든지 그들에게는 섞 이지 않는 구식 여자였다. 경순은 창수를 따라다닐 뿐이어 서 자기의 무엇을 남에게 보이고 들리려고도 아니하였지마 는 또한 남의 행동을 그다지 보고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다.

이따금 밤 주우러 가는 여자들의 행동을 눈주어 보었으나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무슨 비판을 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경순은 그들의 사교적이요 개방적인, 활발이라고도 할 수 있고 경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에 대하여 부러워 하는 기색도 없었지마는, 그렇다고 그것을 비웃는다든지 흉 보는 눈치도 없었다. 그러면 경순은 그만한 것을 판단할 만 한 능력이 없어서 그러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경순은 사슴의 눈과 같이 순하면서도 영채가 도는 눈이라든지, 둥 글고 또 여물게 된 머리라든지, 있기는 확실히 있으면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 재주 기운이 그러한 일을 판단하고도 남 음이 있음 직하건마는, 모든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듣 고도 못 들은 체하는 것은 그에게 그러한 것을 삼킬 만한 도량이 있고 그러한 것을 용납할 만한 덕이 있는 까닭이었다. "오빠, 나는 저기 가서 놀다 올께요."

하고 창수에게 말하는 창옥은 다시 경순을 보고,

"언니, 나하고 저기 가서 놀다 올까?"

하고 손으로 여러 사람들 있는 곳을 가리킨다.

"나는 싫어, 혼자 갔다 와요."

하는 경순의 말에,

"가면 어때, 나는 아는 동무들도 있고, 갔다 올께"

하고 빠른 걸음으로 가는 창옥의 뒷모양을 보다 창수는 다 시 경순의 거동을 살펴보았다. 경순은 여자로서 먼저 나타 나는 인물과 맵시가 별로 빠질 것이 없고, 얌전스럽고 침착 하고 영리한 듯하면서도 덕이 있어 보이는데, 가정 부인으 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조건이 구비된 듯하였다. 게다가 특 별히 아는 체하고 된 체하면서 허영심이 쌓여서 경박한 행 동을 하기 쉬운 신여성에 비하면, 둔박하고 정숙한 것이 많 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창수는 새삼스럽게 자기가 경순이 같은 아내를 둔 것이 행 복스럽게 생각되었다. 자기의 주장으로 신여성에게 장가를 가지 아니하고, 일부러 학교 출신이 아닌 그식 여자에게 장 가를 가게 된 것이 더욱 만족하였다. 경순의 아름다운 것은, 얼굴이나 태도에서보다도 바라지고 촐랑대지 않는 구식스러 운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는 어떠한 여자의 남편이 된 것보다 경순의 남편 된 것이 영원한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거장에 있는 모든 남자와 플랫포옴에서 차 에 오르고 내리는 수많은 남자들이 모두가 경순이 같은 좋 은 아내를 두지 못한 불행한 사내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리하여 창수는 경순을 보면 볼수록 예쁘고 대견하여서, 경 순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아끼고 싶지 아니하였다.

"아차 깜박 잊었군, 점심을 준비해야지."

하고 창수는 경순을 향하여,

"조금만 기다리오, 내 잠깐 다녀올 테니."

하고 빠른 걸음으로 정거장을 나가더니 달음질로 정거장의 건너편에 있는 벤또 집으로 향한다.

경순은 슬금슬금 창수의 뒤를 따라서 정거장의 동편 문을 나서려 할 즈음에, 뒤로부터 경순의 손에 무엇을 쥐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경순은 무심코 가는 중에, 자기의 손에 무엇 이 쥐어지는 것을 깨달았으나, 별로 놀라지도 아니하고 쥐 어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무슨 편지였다. 그제야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으나 오고 가는 사람이 복잡한 틈에 누구의 소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순은 다시금 놀랍고 부 끄러워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경순은 그 편지를 어떻게 주 체할는지 모르다가 우선 손으로 꼭꼭 눌러 구겨서 허리춤에 다 찔렀다. 경순은 얼굴에 불을 담아 붓는 듯이 화끈거리고 등에서 땀이 흐른다.

? 이것이 무슨 편지일까? 대관절 누구의 짓일까? 어느 부 랑자의 짓일까? 아는 사람의 장난일까? 무슨 비밀한 일일까?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순은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였다. 으슥한 곳에 가서 그 편지를 찢어서 버리고 싶었으나, 편지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서 한 번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만일 연애 편지 같은 것을 많 이 받아 본 여자라면, 가만히 편지를 쥐어 주는 것쯤은 그 다지 놀랄 일도 아니오, 또는 누구의 소위인지는 모를지라 도 그 편지의 내용은 짐작할 것이며, 가령 그 편지의 내용 이 연애에 관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호기심으로 그 편지 에 대하여 무슨 기대를 가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 러한 일은 꿈에도 모를 뿐 아니라, 같은 동무간에도 편지를 주고 받고 한 일이 별로 없는 경순으로는, 어떤 사람으로부 터 편지를 몰래 손에 쥐어 주는 일은 천지간에 큰 괴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경순은 마음을 진정하 려면 할수록 더욱 흔들렸다. 경순은 처음에 정거장을 나을 때에는 창수를 따라가서 무엇을 사든지 받아 가지고 오려고 하였으나, 편지를 받은 뒤엔 그러할 용기조차 없어졌다. 그 러나 그 자리에 있기도 불안하여 앞마당으로 전차길을 향하 여, 방향없이 가는 사람처럼 기운 없이 나오다가, 벤또를 사 가지고 다시 과실전에 가서 과실 한 뭉치를 싸가지고 오는 창수를 보았다.

창수를 본 경순은 갑자기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울렁거리 던 가슴이 다시 내려앉는 듯하면서 몸둘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진정하고, 마주 나가서 창수의 들고 오는 것을 다 받으려 하였으나 창수는 다 주지 아니하고 과실 그 릇만 주었다. 다른 때 같으면 창수와 어깨를 견주어서 나란 히 올 것이로되, 경순은 자기의 기색을 감추기 위하여 짐짓 창수의 뒤에 따라갔다. 창수도 경순의 기색이 평시와 다른 것을 깨달았으나 특별히 이상히 여기지는 아니하였다.

정거장에서는 경부선 차가 떠난다고 외치는 소리가 나고, 승객들은 플랫포옴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창수와 경순은 달음질로 오다가 차표를 사들고 마주 나오는 창옥을 만나서 바삐 들어가는 바람에, 경순의 이상한 기색은 그리저리 감 추어지고 말았다. 경순은 그러한 기회를 타서 적이 안심도 하고, 허리춤에 찔렀던 편지를 손길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안양 정거장에는 홀연히 사람의 바다를 이루었다. 안양은 조그마한 촌락으로 아직 초창한 곳이니만큼, 한꺼번에 그만 한 사람을 맞는 것도 적지 아니한 성황이었다. 많은 사람들 은 신문사원의 인도를 받아서, 준비하여 놓은 휴게소로 향 하였으나 창수의 일행은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안양은 신문사의 주최로 습율 대회를 하는 처소 중의 한곳 으로 밤의 명소처럼 알려졌지만, 밤나무가 그다지 많은 것 은 아니었다.

"밤나무 있는 데가 어디요?"

하고 묻는 경순의 말에,

"나도 처음이라 모르겠어."

하고 다시,

"오빠, 밤나무 있는 데가 어디요?"

창옥은 경순의 말을 받아서 창수에게 다시 묻는다.

"저게 다 밤나무 아니냐."

하고 창수는 벌판에 드문드문 선 밤나무를 가리킨다.

"저기 가 밤줍기놀이 하는 덴가요?"

경순은 창수에게로 다가가면서 조금 이상한 듯이 말하였다. "그럼, 저기서 밤줍기도 하고 여흥도 하고 그렇지요."

창수는 경순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밤나무가 많은 줄 알았더니, 어디 얼마 된다구요."

하는 경순은 생각하던 것보다는 아주 틀린다는 듯이 가볍 게 실망을 느낀다.

"글쎄 말이야, 나도 밤나무가 퍽 많은 줄 알았더니 저것뿐 이면 아주 껄렁한데."

창옥은 창수가 대답하기 전에 경순의 말을 거들었다.

"밤나무가 저만하면 무던하지, 얼마나 많아. 저 밤나무 하 나만 따도 얼마를 딸는지 모르는데."

하고 창수는 다시,

"저 밤나무 밑에서 좀 쉬어요. 나는 가서 밤나무를 사야지." 하고 동리로 들어간다.

경순과 창옥은 거기 앉아서 조금 쉬다가 가까이 있는 밤나 무 밑으로 가서 거닐었다.

"여기 알밤이 떨어졌어."

하고 창옥이 풀 속에서 밤하나를 주워서 경순에게 보이면 서,

"이것 좀 봐, 알밤이야."

하였다.

"참말 어쩌면 아주 밤이 크고 좋은데 가운데 톨이로구면.

가운데 톨이 떨어졌을 때는 양쪽 갓톨도 떨어졌겠지. 어디 찾아볼까?"

하고 경순은 오른발로 풀을 이리 젖히고 저리 젖히면서 기 웃기웃하더니,

"옳다, 여기도 있는데."

하고 밤 하나를 주워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창옥을 보이면 서,

"이것 봐 외톨밤이야. 동글동글 하니 아주 예쁘지."

하며 못내 사랑스러워한다. 그들은 서울에서 생장하여서 별로 시골 구경을 하여 본 일이 없는지라, 밤이라면 장사에 게서 사 먹는 줄만 알고 밤이 나무에 어떻게 열리고 어떻게 따는지는 자세히 모르다가, 톨에 있는 밤나무 밑에서 발갛 게 익어서 절로 떨어진 알밤을 자기 손으로 줍는 것이 얼마 나 새롭고 즐거운 일인지 모르는 것이어서, 천하의 맑은 가 을의 풍미는 온통 그들의 손에 모은 듯하였다.

"에그 예쁘기도 해라. 외톨 밤은 더 예뻐. 언니만큼이나 예 쁜데."

하고 창옥은 웃으면서 경순을 쳐다본다.

"누가 그런 소리 하라나, 놀려 먹기는……."

"아니야, 정말이야. 언니가 좀 예쁘오, 그러니까 오빠가 여 간 사랑하지 않지."

"또 그건 무슨 소리야. 사랑이 또 무슨 사랑이야."

"그럼 그 위에 얼마나 더 사랑하우. 오빠가 언니를 정말 사 랑하우. 여간이 아닌데."

하고 창옥은 웃지도 아니하고 진정한 표정으로 말한다.

"글쎄, 듣기 싫어요. 그런 소리는 그만두어요. 여간 아니긴 무엇이 여간이 아니야. 누구는 내외간에 밤낮 싸움만 하고 지내나. 다 그렇구 그렇지. 어디 특별히 사랑하는 증거를 내 놓아. 좀 들어 보게."

하고 서글픈 웃음을 웃는 경순은 창옥의 말이 한때의 농담 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어쩐지 창수가 자기를 특별히 사랑한 다는 말에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 둘, 줍는 밤이 주먹이 벌게 되었다. 창옥은 손수건에다 주운 밤을 싸 놓은 뒤에,

"여보, 언니!"

하고 경순을 보면서 말머리를 정중하게 꺼낸다.

"오빠가 언니를 특별히 사랑하는 증거를 댈테니 들어보시오. 우선 결혼하시 전에도 여간 사랑한 것이 아니오. 물론 외쪽 사랑이지마는. 그때 언니야 어디 오빠를 한 번인들 만 나보기나 하였소? 오빠가 어느 기회에 언니를 보고, 또 언 니의 소문을 듣고서는 그만 야단이었소. 그래 언니와 결혼 하게 해 달라고 어머니를 졸라대고 나까지 졸라대어서, 할 수없이 청혼을 해 보니 어디 잘 되오? 언니도 알다시피 언 니 어머니가 학생 사위는 재미 없다고 안 듣는 것을, 빌다 시피 하여서 억지로 되지 않았소? 그때에 오빠는 언니하고 결혼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야단을 하였소. 결혼이 안 되 었으면 오빠가 죽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요. 그러니 결혼하 기 전만 하여도 얼마나 사랑하였소? 글쎄 이것 좀 보아요.

나중에 결혼하기로 허락이 났다니까, 오빠가 어머니 앞에서 어린애처럼 춤을 덩실덩실 추었어요. 그때 내가 보고서 어 떻게 웃었던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우스워 못 견디겠어."

하고 창옥은 간간이 웃는다. 경순도 머리를 숙이고 웃다가,

"거짓말이지, 설마 춤이야 추었을라고."

하고 다시 창옥의 기색을 본다.

"거짓말이 뭐요? 춤이면 여간 춤인가. 바로 댄스를 했어요.

글쎄 그래서 어머니도 웃고 나도 웃는데 문 밖에서 아버지 들어오시는 소리가 나니까 그쳤지요. 그리 안 했으면 얼마 를 더 추었을는지도 모르지. 그래 아버지가 들어오시니까 오빠는 열적어서 얼굴이 벌거니 하여 나가고, 우리들은 웃 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왜 그렇게 웃느냐고 물으시지요. 그 러나 어디 그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 웃고 말았지요.

그러나 오빠가 얼마나 좋아야 춤을 다 추었겠느냐 말이요.

그러니 그것이 오빠가 결혼하기 전부터 언니를 얼마나 사랑 하였다는 증거가 아니오? 또는 결혼한 뒤에 이내 따로 난 것은 그게 무슨 일인지 아우? 그것도 언니를 사랑하는 까닭 이요. 말에는 집안이 어려우니까 따로 나가서 벌어먹고 살 아야 한다고 하지마는, 그것은 핑계고 기실은 언니가 시부 모 밑에서 시집살이를 하려면 고생이 된다고 그래서 따로 난 것이오. 오빠가 벌기는 무엇을 벌우? 두 집 살림하기에 더 어렵기만 하지. 그러니 그것도 언니를 사랑하는 증거고, 또 얼마 전인가 아버지가 오빠보고 동경 유학을 가라고 하 셨지요. 학비를 다는 대줄 수가 없으니 친구에게 구걸이라 도 해서 한 달에 삼십원씩은 대어 줄 터이니 가서 고학이라 도 하라고. 그러니까, 아버지 앞에서는 들을 만하더니 나중 에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언니 때문에 못 가겠다고 그러겠지.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오빠가 유학을 가면 언니가 혼자 있게 될 것인즉, 혼자서 갈 수는 없고, 가면 둘이 가야 할 터인데, 학비가 부족하여서 못 가겠다고 그러겠지. 그러니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거든. 오빠가 떠나면 언니가 왜 혼자 있게 되오.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지. 또 같이 살기가 어려 우면 친정에 가서 혼자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도 좋고.

그런데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말은 핑계고, 언니하고 떨 어질 수가 없어서 못 가는 것이니, 얼마나 사랑해야 그러겠소?" 하고 경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는 창옥은,

"그러니 언니 같은 아내를 둔 오빠도 행복이지마는,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을 둔 언니도 행복이 아니오?"

하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나 그뿐이요. 집에만 오면 언제든지 언니 칭찬이요. 어 머니보고도 칭찬, 나보고도 칭찬, 아버지보고만 못하지. 한 번은 하도 칭찬을 해쌓기에 어쩌나 보노라고 내가 언니의 흉을 좀 보았더니 펄펄 뛰겠지. 그래 나는 언니 발꿈치도 못따라 간다나, 그러구 야단이겠지. 그러니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우. 나는 첨 보았어."

하고 부러워하는 듯이 경순을 본다. 경순은 창옥이 얼마간 부러워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하여간 만족하였다. "정말 그럴까?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 같은데, 무얼 그렇게 사랑할라구. 공연히 그러는 게지."

경순은 겸손한 태도로 말하였다.

"언니는 학식이 없는 까닭으로 더 사랑을 받는 것이요. 오 빠는 일부러 구식 여자를 고르는 것이요. 여학생들이 오빠 에게 청혼한 사람들이 많았소. 오빠가 미남자가 아니오? 그 러니까 여학생들이 따르기도 하였으나, 무슨 고집인지 여학 생은 싫고 구식 처녀에게로 장가를 가겠다고 해서 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이요. 하기야 언니를 특별히 사랑하는 까닭 이겠지만. 그러니까 언니가 학식 없는 것은 조금도 걱정하 지 말아요. 그것이 오빠의 사랑을 받는 데는 더 좋은 것이 에요."

하고 말을 계속하려 할 즈음에,

"정신 없이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누."

하는 소리에 경순과 창옥은 조금 놀라면서 돌아보니, 창수 가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옆에 섰다.

"아이 깜짝이야, 기척도 없이 그렇게 오시우."

하고 창옥이 눈을 흘기는 듯이 창수를 본다.

"기척도 없기는 왜? 저기서부터 얘기도 하고 기침도 하고 왔는데, 여자들은 만나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얘기 에 팔려서 사람 오는 줄도 몰랐지."

하고 창수는 말은 창옥에게 하면서 눈으로는 경순을 보고 웃는다. 경순은 창수가 오면서 행여 자기네 하는 말을 들었 는가 하여서 얼굴빛이 조금 붉어지는 듯하였으나 창수를 보 는 눈은 고요하고 마음은 고동되었다. 그러나 경순은 소리 없는 한 웃음으로 모든 것을 흐려 버렸다.

"이 근방 밤나무는 습율 대회에서 다 샀다니까 변두리로 나가야지."

하고 창수는 같이 온 사람과 앞서서 해죽해죽 간다. 경순 과 창옥은 찬찬히 뒤를 따라간다. 창수는 조금 가다가 같이 가던 사람에게서 밤나무를 두 주를 사고 그 사람은 돌려 보 내었다.

"자, 어떻게 할까? 조금 놀다가 아주 점심을 먹고 시작할까. 밤을 먼저 따고 점심을 나중에 먹을까? 어떻게 하면 좋 을까?"

하고 창수는 경순과 창옥을 번갈아 본다.

"글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경순의 말에,

"지금 점심을 먹으려면 조금 이르고 다 따고 먹으면 너무 늦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밤나무가 둘이나 먼저 하나를 따 고, 그리고 점심을 먹고 놀다가 또 한나무를 따고, 그러지."

하고 창옥이 판단을 내리니까, 창수와 경순은 그 말에 동 의 하였다.

조금 있다가 창수는 마을에서 얻어 가지고 온 대장대를 짚 고 일어서면서,

"자, 이제 밤을 딸 터인데 거저 주우면 재미 없고 내기를 하지."

하고 경순과 창옥을 돌아본다.

"무슨 내기요?"

하고 창옥이 나선다.

"많이 줍는 사람이 이기고, 적게 줍는 사람이 지기지."

"그런데, 이기면 어쩌고 지면 어쩐다는 조건이 있어야 내기 가 되지요."

"물론이지, 지는 사람은 이기는 사람에게 주운 밤을 얼마든 지 다 빼앗기기로."

"그럴까?"

하고 창옥은 혼자 판단을 짓기가 어렵다는 듯이 경순을 돌 아본다. 경순은 눈을 깜박거리며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무렇게 하여도 이기기만 하면 고만이지. 그리고 내기를 한 가지 더 하지."

"무엇?"

하고 창옥이 이상한 눈으로 경순을 보면서 대답을 기다린다. 창수도 경순을 보고 기다리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인다.

"지는 사람 둘이 이기는 사람 하나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기."

하고 경순은 창수를 보고 웃는다.

"그럼 그럴까? 그러나 우리들이 지면 어쩌나. 나는 오빠에 게 절을 해도 관계 없지만, 언니가 절하기는 좀 창피할 텐데." 창옥은 창수와 경순을 조롱하는 듯이 말한다.

"그럼 그러지, 그것 좋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에게 절 하기로 하자."

하고 창수는 팔을 뽐내고 나선다.

"그러면 누구든지 내기 시행을 아니하면 안 되어요. 절을 하되 꼭 코가 땅에 닿도록 하기루요."

하는 경순의 말에,

"언니 무슨 수가 있우. 꼭 이길 것처럼 말을 하게."

하고 창옥은 경순의 힘있게 하는 말에 다소의 의심을 품는 듯하였다.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내기를 아니하면 모르되, 하면 단단히 해야 하는 것이거든. 그리고 사내들은 내기를 하고서도 자기가 지면 이 핑계 저 핑계 하고서 내기 시행을 않기가 일쑤니까 단단히 따져야지."

하고 경순은 창수가 보지 못하도록 창옥에게 눈을 끔쩍인다. "내기 시행을 않기는 왜? 사내가 어디 그런 사내가 있담.

내기를 하고서 내기 시행을 않는 사내는 비겁한 사내지. 더 구나 여자에게"

하고 창수는 우연한 기회에 한 말로 천하의 남자를 다 변 호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밤줍기 내기기는 홀연히 남녀의 권리다툼과 신의 (信義) 문제가 되어서, 여러 가지 다짐으로 빈틈없이 맺어졌다.

"자, 그럼 내가 올라가서 딸 터이니 내가 따는 때는 밤을 하나라도 주워서는 안 되오. 내가 다 따고 내려온 뒤에 같 이 주워야지."

하고 창수는 장대를 가지고 밤나무로 오라간다.

"그야 물론이지요. 자, 우리 저만치 멀리 가자구. 나중에 또 억지 쓰는 소리 듣지 말고."

하고 경순은 창옥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무엇을 그렇게 소곤거리는지 소리가 창수에게 들리지 아니할 만큼 웃는다.

창수도 나무에 올라가서 밤을 떨기 시작한다. 알밤도 떨어 지고 송이밤도 떨어지는데, 알밤 떨어지는 것이 견디기 어 려울 만큼 재미가 있어서, 곧 가서 떨어지는 대로 줍고 싶 었지만, 경순과 창옥은 서로 눈짓으로 경계하여서 하나도 줍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먼저 줍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 기 위한다느니보다 창수에게 핑계 댈 말 재료를 주지 아니 하려는 까닭이었다. 창수는 한 나무를 다 떨고 내려오더니,

"아까는 한 나무를 먼저 떨어서 줍고, 한 나무는 점심 먹고 서 줍는다고 하였지마는, 내기를 하는 바에는 두 번에 전주 러 하는 것이 재미 없은즉, 두 나무를 다 떨어놓고서 줍기 는 점심을 먹은 뒤에 한꺼번에 줍는 것이 어떠할까?"

하고 경순과 창옥의 동의를 구한다. 경순과 창옥도 그것을 응낙하였다. 창수는 다시 알밤 한 주먹을 주워다가 경순과 창옥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것은 특별히 까먹으라고 주는 것이니, 그 사이에 까먹되 만일 하나라도 남겼다가 내기하는 다음에 보태면 아니 되오." 하고 당부를 하며 웃지도 않는다.

"누구든지 하나라도 먼저 주우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웅큼 이나 먼저 주웠으니 법칙은 법칙이오마는,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그리 마시오."

하고 창옥이 밤을 받으면서 말을 하고 경순을 보고 웃는다. "사내들은 그렇다니까, 이따가 내기할 때도 보아요. 무슨 핑계를 하든지 할 터이니."

하고 경순은 창옥을 보고 눈을 끔쩍이려다가, 다시 창수의 얼굴을 쳐다보고 고개를 숙인다.

"원 이런, 자기네들이 거저 앉았는 것이 심심할 듯해서 까 먹으라고 주워다 주니까, 고맙다는 소리는 아니하고 도리어 법칙이니 무엇이니 하니 법칙이 무슨 법칙이람."

창수는 혼잣말 비슷이 말을 한다.

"주워다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마는, 누구든지 먼저는 하나 도 줍진 않기로 하였는데, 우리에게 의논도 아니하시고 혼 자 한 주먹을 주우셨으니 그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고 무었 이어요. 여자들이라고 업신여기지 마셔요. 그리고 이따가 정 말 내기할 때는 억지 쓰지 마세요."

하고 경순은 혼자 주운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보다 이따가 억지 쓰지 말라는 말에 힘을 들였다. 그리고 손가방에서 조 그마한 칼을 내어서 밤을 벗긴다.

"제참."

하고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돌아서서 가려는 창수에게,

"조금 계세요."

하고경순은 밤을 얼른 벗기더니 새 손수건으로 손 닿았던 곳을 깨끗이 씻고 창수에게 주면서,

"밤이나 하나 잡수세요, 규칙을 어기신 벌로."

하는데 창옥은 손바닥을 치면서,

"언니 걸작이야, 벌로 드린다는 말이 걸작이야. 에그 고소 해라."

하고 창수를 쳐다보며 웃는다.

"벌이라도 상으로 알고 먹으면 그만이지."

하고 창수는 경순이 주는 밤을 받아서 한입에 넣고 어석어 석 깨물면서 밤나무를 향하여 간다.

창수가 밤을 따는 사이에 경순과 창옥은 점심 먹을 준비를 하였다. 풀밭에 정한 곳을 찾아서 신문지를 깔아 놓고 그 위에다 벤또와 실과를 고루 놓고 창수의 밤 따는 것을 바라 보았다. 그들은 창수의 밤 따는 것을 거들어 주고도 싶었으 나,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그만두었다.

"에 덥다. 가을날이라도 일을 하니까 덥군."

하고 창수는 밤을 따고 돌아오면서 수건으로 땀을 씻는다.

"더우시지요?"

하면서 마주 나가는 경순은 창수에게 다른 수건을 주며 땀 묻은 수건을 받아 들고, 뒤에서 부채질 하면서 따라 온다.

창옥도 일어나서 맞는다.

"어! 된데. 밤따기에 기운이 다 빠져서 주울 때는 얼마 줍 지 못하겠는걸."

하고 창수는 자리에 펄썩 주저앉으면서 반 비스듬히 눕는다. "기운이 없어서 밤 주우시기에 어려우시면 내가 도와 드리 지요."

하는 경순의 말에,

"천만에, 도와 주다니. 도와 준다는 말은 좋은 의미로 모욕 하는 말인데, 대장부가 아무리 기운이 없기로 아녀자의 도 움을 받다니."

하고 창구는 벌떡 일어나면서 두 팔에 힘을 올리고, 힘있 는 눈으로 경순과 창옥을 본다.

"약한 여자에게 용맹을 말하는 것은 졸장부에요. 그리고 힘 으로는 이겨도 꾀로는 지는 수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 다나요. 오빠두 너무 큰소리를 하시다가 내기에 지면 조금 부끄러울걸."

하고 창옥은 조롱하는 듯한 눈으로 창수를 보다가 다시 경 순을 보고 웃는다. 창수와 경순도 같이 웃었다.

점심을 마친 그들은 산보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바람 이 건들건들 불면서 서편 하늘에 검은 구름이 오락가락한다. 그들은 밤을 줍기로 하였다.

"자, 지금부터 밤을 주울 터인데, 내가 호령을 할 터이니 호령이 끝나면 일제히 줍기로 합시다."

하는 창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순과 창옥은 밤 주워 담을 그럿과 밤 깔 꼬챙이를 든 채로, 군사가 상관의 앞에 호령 을 기다리듯이 창수의 앞에 나란히 서서 입을 다물고 웃음 을 참는다. 창수의 똑바로 서서 하는,

"하나, 둘, 셋."

소리가 끝나자 세 사람은 각각 달려가서 밤줍기를 시작하 였다. 그들은 누구든지 알밤을 먼저 줍고 밤송이는 한편으 로 젖혀놓는다. 그들은 서로 흘금흘금 보며 웃기는 하여도 말이 없다. 경순과 창옥의 눈은 언제든지 창수의 손을 보고 창수는 경순과 창옥을 번갈아 본다. 경순과 창옥은 창수로 하여금 자기들을 자주 보게 하기 위하여, 무슨 소리도 내고 이상한 동작도 한다. 그것은 창수로 하여금 자기네 보기에 자주 눈을 팔아서 밤 줍는 능률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아닌 게아니라, 그러한 병법을 알지 못하는 백면장군(白面將軍)인 창수로는 적장(敵將)의 이목을 어지럽게 하기 위하여, 의병 (疑兵)을 쓰는 낭자군(娘子軍)을 저당하기에는 미치지 못하 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랑하던 「힘」으로써가 아니라 창옥의 이른바 「꾀」로써이었다. 그리하여 창수의 전투력은 전일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창수의 칼 쓰는 법 이 어지러울수록 경순과 창옥의 유인하는 계교는 더욱더욱 기이하였다.

그들은 알밤은 다 줍고 밤송이를 발르기 시작하였다. 창수 는 익은 놈이나 선놈이 나 모조리 발른다. 익은 놈은 쉽사 리 발라지지마는 자위가 돌지 아니한 놈은 용이하게 발라지 지 아니하여서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경순과 창옥 은 발로 썩썩 비벼서 툭툭 벼지는 놈만 바르고, 자위가 돌 지 아니한 놈은 한편으로 치워 놓고 풀로 덮어 놓았다. 밤 송이가 거의 다 되었을 때,

"오빠, 오빠."

하고 부르는 창옥이는,

"왜?"

하는 창수의 대답을 들은 뒤에,

"나는 손에 밤가시를 찔려서 발를 수가 없어, 나는 내기에 서 빠질 테야."

하고 응석 비슷하게 말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질 듯하니까 빠진다는 말이지."

하고 창수는 냉담하게 대답한다.

"아니오, 정말 가시 찔린 손이 아파서 발를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해."

"안돼. 그렇다고 빠지고 저렇다고 빠지면 내기가 되나. 잘 발르기도 하고 못 발르기도 하니까 내기가 되는것이지. 다 똑같이 발르면 지고 이기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딴소리 말고 부지런히 발르자."

하고 창수는 더욱 힘을 내어서 빨리 발른다.

"그런 소리 말아요. 지면 거저지지, 왜 그런 창피한 소리를해. 그렇잖아도 여자들을 업신여기는데."

하고 경순은 일어서서 허리를 추면서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말을 한다.

"참 그래, 되지도 않는 일을 공연히 말을 하여서 창피만 당 하였네."

하고 창옥은 경순을 보고 눈을 끔쩍인다. 그러는 동안에 밤줍는 것은 끝났다.

"자, 이젠 거의 다 주웠으니 하여간 남은 것은 나중에 주울 요량하고, 그만 다 가지고 와서 세어 보아요. 또 호령을 할 터이니 일제히 그쳐요."

하고 창수는 숨을 돌리고,

"하나, 둘, 셋."

한다. 경순과 창옥은 일제히 밤 꼬챙이를 던지고 섰다.

"자, 이리들 가지고 와요."

하고 창수는 여러 군데 주워 놓은 밤을 거둬 모은다.

경순과 창옥도 밤을 거둬 모아서 경순의 것만 가지고 왔다. "왜 창옥이는 안 가지고 오니?"

하는 창수의 말에,

"어서 두 분의 것이나 먼저 세어 보아요. 나는 나중에 가져 올 터이니"

하고 창옥이 대답한다.

"같이 갖다 세어 봐야지, 왜 나중에 가져오기는?"

"같이 가져 오면 세사람의 몫을 한꺼번에 세어 보나요. 아 무래도 하나씩 셀 테니 오빠 몫을 먼저 세고 그 다음에 언 니 몫을 세어요. 내 몫은 맨 나중에 갖다가 셀 테니."

"그럼 그러지."

하고 창수는 자기의 것을 센다. 하나 둘 세기 시작하여 반 이나 세었을 때에, 잘못 세었느니 잘 세었느니 하는 이의가 생겨서 다시 셀때에는 서른 개씩 무더기를 지었는데, 열 다 섯 무더기하고 세 개가 남았다.

"자, 일 삼은 삼, 삼 오 십오 하면, 사백 오십개에다, 세 개 를 가하면 사백 쉰 세 개. 자 이것을 똑똑히 적어요."

하고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어 창옥을 준다. 창옥은 수첩과 만년필을 받아 가지고,

"오빠, 사백 오십 삼 개."

하고 똑똑히 썼다. 경순은 옆에서 그것을 보다가,

"오빠라고 쓰면 안 되어요. 자기에게 오빠지 다른 사람에게 도 오빤가?"

하고 조금 샘을 내는 듯이 말한다.

"그럼 뭐라고 적을까?"

하는 창옥의 말에,

"성명을 쓰든지 김 선생이라고 쓰든지 하지."

하고 경순은 창수를 쳐다본다. 창수도 성명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하여서 창옥은 다시,

"김 창수, 사백 오십 삼 개."

라고 고쳐 썼다. 그 다음에 경순의 밤을 세어보니 서른 개 씩 스물 세 무더기가고 일곱 개가 남았다.

"나는 구구를 모르니까 주먹구구로 쳐보지. 서른씩 스물이 면 육백 개, 또 세 무더기에 아흔개, 그러면 육백 아흔 개에 다 일곱 개를 더하면 도합이 육백 아흔 일곱 개."

하고 경순은 다시 창수를 보고,

"그렇지요. 육백 아흔 일곱 개지요, 틀림없지요?"

하고 다진다. 창수가 대답하기 전에 창옥이 먼저,

"틀림없지. 그럼 다시 세어 보아도 알 터인데."

하더니 다시 창수를 보고,

"그대로 쓰리까?"

하고 묻는다.

"쓰나마나 웬 게 그렇게 많을까?"

하는 창수의 힘 없는 말에,

"웬 게 그렇게 많다니, 많이 주웠으니까 많지."

하고 창옥은,

"조 경순, 육백 구십 칠 개."

라고 쓰고,

"그러면 오빠가 지셨으니 내기 시행을 하셔야지."

하고 창수를 본다.

"또 네것을 가져오너라, 세어 보게."

"내것은 세어 볼 것도 없어요. 원체 적게 주웠으니까."

"적으나 많으나 세어 보아야지, 어서 가져와요."

"나는 손이 아파서 주울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또 졌다고 항복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어요."

"그래도 가져는 와야지. 어서 가져와."

하고 창옥을 본다. 창옥은 자기의 주운 것을 갖다가 놓으 면서,

"이것 보세요, 얼마 되는가. 세어 볼 것도 없다니까."

한다. 창수는 생각하던 것보다 너무나 턱없이 적은 창옥의 밤을 보고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안돼, 이것은 협잡이다. 경순이 것까지 무효다."

하고 기운을 낸다.

"웬 말씀이세요? 협잡이 무슨 협잡이예요. 지셨으니까 생떼 거지를 쓰세요 그래."

경순은 웃음을 참고 말한다.

"협잡이지, 그럼 뭐요? 많아도 분수가 있고 , 적어도 분수 가 있지. 경순이 몫은 너무 많고 창옥이 몫은 너무 적은 것 이 탈이 붙은 거지, 뭐람."

"탈이 무슨 탈이 붙어요?"

"탈이 무슨 탈이야, 창옥의 밤을 경순이게게 보태었지.

"보태기는 누가 보태요? 내가 이길 생각 않고 남보고 이기 라고 내것을 남에게 보태 줘요. 당치 않은 말씀 마시고 내 기 시행이나 하세요.

하고 창옥이 들고 일어난다.

"그런 소리 말아요. 누가 장원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질 터이요. 만일 내가 장원을 하면 둘이 다 질 터이니까. 약은 꾀로 둘이 공론하고서 나만 이길 양으로 보태 준 것이지, 딴은 되긴 되었어 그러나 꾀라는 것은 남이 모르도록 써야 하는 것이지 그렇게 야틈야틈한 꾀를 써서는 못 쓰는 것이야." 하고 창수는 무슨 어려운 일을 알아낸 듯이 뽐낸다.

그러나 경순과 창옥은 용이하게 창수의 말을 들을 리는 없 는 것이었다.

"지면 거저지지,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그렇지, 지시면 무슨 핑계를 하든지 내기 시행을 안 하실 줄 알았지. 사내들은 그렇게 신용이 없다니까."

"사람이 지든지 이기든지 정정당당하게 하는 것이지. 지고 서도 내기 시행을 아니하려고 당치 않은 핑계를…… 어쩌면 그래."

"지고서도 내기 시행을 아니하려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것이 도리어 비겁한 일이에요. 그것은 내기로만 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지는 것이어서 어느 편이 손해가 될는 지 모르지."

"내기 시행이야 하나마나, 지고 이기는 것은 판단이 났으니 까 이겼으면 그만이지. 내기 시행을 않는 것은 잘못하는 것 이 그 사람에게 있겠지."

이렇게 서로 말을 하다가 창옥이 일어서더니,

"오빠야 하든지 말든지 내가 내기 시행을 해야지. 나까지 오빠를 따라서 나쁜 사람이 될 순 없으니까."

하고 자기의 주운 밤을 경순의 앞으로 밀어놓고 다시 일어 나더니, 절을 하면서 손으로 풀을 헤치고 코를 땅에 댄 뒤 에,

"이만하면 코가 땅에 닿았겠지요?"

하는 말에,

"에그, 저 코에 흙 묻겠네, 그만 일어나요."

하고 경순은 허리를 굽혀서 맞절을 하였다.

"그래 오빠는 절을 아니할 테요?"

하는 창옥의 말에,

"내가 어디 졌어야지. 지지 아니한 것을 절을 해?"

하고 창수는 서글픈 웃음을 웃는다.

"지지 않다니, 적게 주운 사람이 이기기로 했나요?"

"많이 주운 사람이 이기기로 하였지마는, 둘의 것을 보태었 으니까 무효란 말이다."

"그러지 말고 내기 시행을 하기 싫거든 정정당당하게 하기 싫다고 그러세요. 공연히 구차스럽게 당치 아니한 핑계를 꾸며 대지 마시고, 그러면 사람까지 밑지는 것이어요."

그리하면서도 경순과 창옥은 벌갈아 가며 창수를 조롱도 하고 절 하라고 권하기도 하여서 창수는 정히 곤란한 지경 에 빠져 있었다. 그러자 그들의 뒤로부터,

"김군인가."

하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서 소리나는 곳을 보았다.

"아, 성숙인가."

하고 창수는 그 사람의 앞으로 나아가서 악수를 하면서,

"그런데 어쩐 일인가? 언제 내려왔나?"

"나도 아까 차에 내려왔네. 차에서 내릴 때에 자네를 언뜻 보았으나 미처 인사를 못했고, 돌아다니다가 보니까 자네가 여기 있기에 왔네. 방해되는 일이나 없겠나"

"방해, 무슨 방해? 그런데 혼자 왔나?"

"혼자 왔지."

"그러면 나하고 놀다가 같이 올라가세."

"그럴 수가 있나. 보아하니 자네는 같이 오신 분이 계신 데……"

"관계 없네. 하나는 나의 아내고, 하나는 나의 누이동생일세. 우리는 점심 먹고 밤도 다 줍고 남은 일은 가는 일밖에 없네. 나하고 같이 놀다가 같이 가세."

"그럼 그럴까."하고 그들은 자리를 조금 띄어 앉아서이야기 를 시작한다. 그 사람을 본 경순은 가슴이 선뜻하면서 울렁 거리기 시작하였다.

경순은 성숙과 서로 낯을 대하여 말을 해 본 일은 없어도, 그의 얼굴을 먼 빛으로 알기는 하였던 것이다. 경순은 성숙 을 보자마자 경성역에서 자기의 손에 편지를 쥐어 준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 망할 녀석, 편지가 무슨 편지야. 청혼을 하다가 안 되었 으면 그만이요, 나는 지금 다른 데로 시집을 가서 사는 터 인데, 편지질이 무슨 편지질이며, 또는 편지를 할 일이 있으 면 적당히 할 일이지, 여러 사람이 모인 중에서 가만히 쥐 어 주는 것은 무슨 나쁜 행동일까? 만일 다른 사람이 그것 을 보았다면 나를 얼마나 단정치 못한 사람으로 알까? 여기 까지 따라온 것도 나 때문에 따라온 건지도 모르지. 참 비 겁한 사내다. 내가 저런 비겁한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면 얼 마나 불행이었을까? 그 전에도 정식으로 청혼을 하다가 우 리 어머니가 듣지 아니하시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에 게 편지를 들려 보내는 것을 하나도 보지 아니하고 불살라 버리고 말았는데, 지금 또 편지를 하고 따라다니면 어쩌자 는 일인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서 나의 일에 무슨 흉계로든 지 방해나 하지 아니할까. 그자가 나의 남편과 친한 모양인 데, 나에게 편지를 가만히 쥐어 주기까지 한 것은 더구나 고약한 사람이 아닌가. 집에 돌아가서 차라리 나의 남편에 게 그자의 행위를 말하여서 그자와 교분을 끊도록 하여 볼까. 그러나 그것도 여자로서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도는 세상에서 공교한 일도 없는 것이 아닌즉, 그 편지가 혹은 다른 사람의 소위인지 도무지 모르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저 사람이 여기 온 것도 나에게 대해서 는 아무 관계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편지의 사연을 보 지 아니하고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모르면 모르 되 저자의 소위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경순은 가슴이 설레여서 적 지 아니한 불쾌를 느끼면서 침착히 생각하다가,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우."

하는 창옥의 말에 놀라서 머리를 드는 경순의 얼굴은 화끈 거리고 가슴이 섬뜩하였다.

"무엇을 생각하느라고 그렇게 정신 없이 앉았우. 꿈을 꾸었우?" 하고 창옥은 젖혀 묻는다.

"꿈이 무슨 꿈이야, 잠도 안 자고 꿈을 꾸나."

"그럼 무얼 했수?"

"저, 참선(參禪)."

하고 경순은 웃는다.

"참선? 참선이 또 뭐유, 응 참선! 절에 가서 재 올리는 것 을 구경할 때에 듣는 참선 말이지?"

"그럼."

"옳아, 참선을 하면 부처님이 된다는데, 인제 부처님이 하 나 생기셨군."

하고 창옥은 깔깔 웃는다.

"시끄러워요. 저기 들리는데 가만가만히 말해요."

"들으면 어때요. 언니가 참선을 하면 오빠두 같이 하실걸."

하고 창옥은 다시,

"나도 참선 좀 해볼까."

하고 다리를 접개로 앉더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바르게 한 뒤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성낸 사람처럼 뿌루퉁하고 앉는다. 경순과 창옥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소리 없이 웃는다.

창수가 성숙과 이야기하다가 깔고 앉은 신문지와 밤을 가 지러 가는 동안에, 성숙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아니할 정도에서 끊임없이 경순을 보았다. 경순은 어쩌다가 성숙과 한 번 눈이 마주쳤다. 경순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자기가 다 시 성숙을 보지 아니할 뿐 아니라, 성숙이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돌아앉았다. 그러나 창수와 창옥에게는 그러 한 눈치를 보이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는 경순은 실로 적은 곤란이 아니었다. 창수가 신문지와 밤을 가지고 간 뒤에, 경 순은 창옥의 손을 잡고 다른 방면으로 걸어갔다.

"자,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밤이나 까먹어 가며 이야기나 하세. 이것 깔고 앉게."

하는 창수는 성숙에게 신문지를 주면서 밤그릇을 그의 앞 에 놓는다.

"그러지, 그렇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걸."

하고 회중시계를 내어 보는 성숙은,

"아직 두 시간 가까이 남았으니까……"

하고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내어서 밤을 깐다.

"자네 아직 졸업 못했지?"

하고 창수가 깎은 밤을 입술에 대고 말한다.

"졸업이라니, 작년에사 입학했는데."

"어느 학교인가?"

"일본대학(日本大學) 법과(法科)라네."

"자네 학비는 문제 없지?"

"학비는 넉넉지는 못하나 그대로 문제 없지마는, 어쩐지 법 률에 취미가 없어서 공부가 잘 되지 않네. 그래 이번에 나 온 것도 별로 긴한 일도 없이 나와서 이리 있네."

"그럼 취미 맞는 것을 배우지 왜 법률을 배우기로 하였나?" "허,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인가. 우리 아버지가 법률을 배 워야 나중에 변호사깨나 해 먹게 된다고 자꾸 우겨대시니 할 수가 있나. 내 맘대로 하면 문학이나 음악 같은 예술 방 면으로 나가고 싶은데, 그런 말씀을 하면 열 길이나 뛰시니 하는 수가 있나. 조선은 아직 구도덕을 벗어나지 못하여서 아무것도 안 되네. 예술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것은 모르고 밤낮 먹고 사는 것만 대단한 줄 아니 되겠나."

하고 성숙은 고상한 인생관으로 한 세상을 비웃는 듯이 코 웃음을 치며 말한다.

"그야 그렇지. 공부라는 것이 당자의 소망대로 취미대로 배 우는 것이 원칙이지, 부모라도 간섭할 일이 아니거든. 그렇 지만 나는 취미야 맞고 안 맞고 아무거라도 배우기나 하였 으면 좋겠는데 학비가 있어야지."

하고 창수는 취미에 맞지 않는 공부라도 하는 것이 부러운 듯이 힘없이 말을 한다.

"학비를 구처할 도리가 그렇게 없나. 나는 자세히는 몰라도 변통할 도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도리가 무슨 도리. 변통할 도리가 있을 수가 있나. 자네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하고 창수는 성숙의 입에서 무슨 좋은 계교가 나올까 하고 얼굴을 쳐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린다.

"내 들으니까 자네 처가집이 견딜 만하다는데그려. 거기서 학비 변통을 할 수가 있을 줄로 생각을 하는데. 나뿐 아니 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을 더러 하네, 될 수 없을까?"

하고 성숙은 도리어 의견을 묻는 듯이 창수의 얼굴을 바라 본다.

"처가집에 재산이라야 실로 얼마 되겠나. 우리 장모라는 이 가 혼자 살면서 어렵게 하여서 돈 만원 재산이나 모은 모양 이나, 사내 자식이 체면상 어찌 거기에다 침을 바르겠나. 또 우리 장모라는 이가 여간 지독이 아닐세. 소녀 과부로 바느 질품을 팔아서 그만큼 모을 때 여간하겠나. 자기 한 몸뚱이 먹고 입는 것도 벌벌 떠는데, 학비 하라고 돈 주겠나."

하고 창수는 선웃음을 친다.

"그게 무슨 소린가. 체면상 쓸 수가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린가. 우리네가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 개인만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적어도 조선을 위하고 사회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안할 말로 할 수만 있으면 도적질이라도 하여서 공부를 하 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세. 처가집 돈쯤이야 문제가 되나?

또 혼자 사는 여자가 그 돈은 다 두었다 무엇을 하나? 죽으 면 널 속에 넣어 갈 텐가. 그가 죽으면 아무래도 자네 차지 아닌가. 그러면 죽은 뒤에 쓰나 죽기 전에 쓰나 쓰기는 마 찬가지지. 그리고 다만 문제는 자네 장모가 돈을 주느냐 안 주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도 문제 될 것이 없지. 여자라는 것은 암만 영악하다 해도 어리석은 남자만 못하지. 다 하는 수는 있는데 자네 그만한 수단이 없단 말인가?"

성숙은 말을 중지하고 창수의 눈치를 본다.

"그래, 도리를 말해 보게. 어이 했으면 되겠나?"

하고 창수는 몸을 앞으로 굽히며 성숙을 쳐다본다.

"낸들 무슨 별 도리가 있겠나만, 사내 자식이 그만 수단도 없어 가지고서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있겠나. 여 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 한 마디만 곰살궂게 하면 쓸개라도 빼어 주려고 하는 것일세. 자기의 비위만 맞추어 주면 그만이네. 그런데 자네 돈 사오십 원쯤은 변통할 수 있지."

"그거야 할 수 있지."

"그렇겠지. 그렇거든 돈 한 오십 원 가량만 변통해 두고, 그것으로 무엇이든지 자네 장모가 좋아하는 것으로 사다 주게. 음식이든지 옷감이든지, 하다못해 과자나 과실 같은 것 이라도. 그런데 그런 것도 한꺼번에 사다 주면 재미 없네.

여러 번에 전줄러서 말이야. 며칠 만에 한 번씩 그리고 만 나는 대로 자기를 추어 주게. 무엇이든지 장하다고, 조선에 서 제일이라고. 또 그녀가 소녀 과부로 수절을 하여 가면서 돈을 그만큼이나 모았다니까 추어 줄 만한 재료도 있을 것 이 아닌가. 없는 재료를 만들어서라도 추어 줄 수가 있는데, 있는 재료를 추어 주기야 젓자리도 비지 아니하고 좀 쉬운 일인가. 그리 하되 자네가 직접 돈 말을 하여서는 안 되네.

아무말 말고 무엇을 하다 주어 가며 추어 주기만 하다가, 자네 장모의 마음이 어지간히 대가 들거든 말하게. 자네 부 인에게 말은 하되 못난이처럼 직접 학비를 얻어 달라고 바 둥바둥 졸라서는 안 되네. 응 그 다 아니 있나, 왜 기둥을 치면 들보 울리는 격으로 말이야. 그리 하면 다 되네. 하하하. 안 그런가?"

하고 성숙은 미혹한 중생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도리나 설법한 듯이 자긍하는 빛으로 창수를 보다가, 흘긋 눈을 돌 려서 경순이 있는 곳을 본다.

"이 사람아, 사내 자식이 누가 그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공부를 하지 못했으면 못하였지. 그렇고 정 공부를 하고 싶 으면 신문 배달이라도 하여서 고학을 할지라도."

하고 창수는 성숙의 말을 그럴 듯이 생각하면서도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본의 아닌 말을 하였다.

"고학 고학 하지마는,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행은 어려운 것 일세. 동경에서도 고학을 한다고 시작한 사람은 적지 않지 마는 결과를 지은 사람은 별로 없네. 그러지 말고 내 말대 로 하여서 처가집 돈을 좀 쓰게, 어떻단 말인가."

"글쎄, 학비야 되든지 안 되든지 좌우간 동경을 가기는 가 볼 작정일세, 여차직하면 고학을 하더라도."

"그래 보게, 내 말대로 않더라도 자네 부인에게 말을 하면 안 될 리가 만무하지. 내년 봄에는 반드시 들어오게. 그래 같이 있으면서 공부 좀 해 보세.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들어 가려고 했는데 내 여동생이 편치 않다고 편지가 와서 곧 가 야겠네."

"자네 여동생은 가 있나?"

"응, 내 여동생도 가 있지. 지금 음악학교를 다니는데 그 애 때문에 걱정이야."

하고 성숙은 먼 하늘을 바라본다.

"왜 무슨 일이 있나? 매우 편치 않은가보군그려."

"아닐세, 그 애가 본래 건강체인데 임시로 조금 아픈 것이 야 무슨 걱정이 되겠나. 남녀간에 얼굴이 너무 예뻐도 걱정 일세. 여자는 더욱 그러하지. 내 누이동생 아이는 말하자면 특별한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지. 여자가 인물이 조금 반질 하면 경박하든지 박덕하기가 쉽지마는 이 애는 그렇지 않네. 침착하고 덕성스럽고 인정미가 있고 또 재주가 비상하지. 그러니까 보는 사람마다 칭찬이지마는, 문제거리가 되어 있네 그려. 나이 십팔구 세 된 처녀가 그만큼 되어 있으니 어찌 문제거리가 안 되겠나. 그래서 정식으로 청혼하는 사 람은 많고, 편지질을 하느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혹을 하 느니 별별 일이 다 많은 것이 아닌가. 그래도 그 애는 태산 부동이지. 눈도 안 깜짝이네. 저 할 공부나 하고 꼼짝 않고 지내지. 그러나 나로서는 걱정이 되어서 얼른 마땅한 데로 여의어 버리려고 하나 어디 쉬운가, 그래 걱정이란 말일세."

하고 조금 말을 멈추더니 창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즈 음에 다시 말을 계속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내가 자네게 유의(留意)한 일이 있었 더니……"

하고 성숙은 창수를 본다.

"무엇을 유의하였단 말인가?"

하고 창수는 조금 호기심을 가지고 묻는다.

"지금은 깨어진 시루가 되어서 쓸데가 없이 되었네마는, 나 는 본래 자네를 나의 매부로 삼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 더니, 그러나 그 애가 아직 나이도 조금 어리고 자네도 그 전부터 조혼의 폐해를 말하고, 또는 학생 시대에 결혼하는 것은 재미 없다는 것을 말하기에, 자네도 대학까지나 마치 고 결혼할 줄로 생각하였더니, 그래서 말은 않고 있었으나 생각만은 가지고 있었다네. 지금은 다 허사가 되었네만 아 니찮아. 그리 된다면 자네 학비까지도 미상불 유념을 하려 고 하였더니, 그러나 그게 지금 다 소용 있는 말인가. 그런 줄이나 알아두란 말일세. 세상 일은 다 그러한 것이어든."

하고 성숙은 애석한 듯이 힘없는 웃음으로 끝을 막는다.

"감사한 말일세. 그런데 학비를 유념하겠다는 말은 무슨 말 인가?"

하고 창수는 대개 그 말뜻을 알면서도 짐짓 한번 젖혀 물 었다.

"응. 그것은 그렇게 됐다면 말일세, 자네가 나의 매부가 되 게 됐다면 자네 학비까지도 내가 어떻게든 담당하여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하려고 하였다는 말일세. 자네로서는 동경까 지 가서 공부하기에는 학비가 곤란할 것을 아는 까닭에, 그 렇게까지 생각한 것이요, 한편으로는 나의 누이동생 생각을 하여서 그런 생각이 난 것이라고도 하겟지. 그나저나 다 쓸 데 있는 말인가. 물론나의 누이동생이 자네 같은 남편을 얻 을 만한 인연이 없어서 그리 된 것이지마는, 하여간 나로선 섭섭하게 생각하는 일일세."

하고 성숙은 못내 섭섭히 여기는 기색을 보인다.

"그거야 될 말인가. 내가 자네의 매부 될 만한 보력이 없는 까닭이겠지. 그러나 그처럼 생각하였다는 것은 나로서는 잊 을 수 없는 감격일세.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그만한 정의만은 두고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성숙의 말을 들은 창수는 적지 아니한 충동을 받았다. 성 숙의 누이동생이 그러한 미인이라는 것과, 또는 자기의 학 비까지 대어 주기로 하였다는 것은 한갓 감사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 있어서 실제로 행복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자기가 갑작스럽게 조 비비듯 졸라대어서 경순과 결 혼한 것이 무슨 운명의 작희인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평일 에 경순에 대하여 만족하게 생각하던 것이 우물 안에서 하 늘 보기로 너무도 문견이 좁았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자 기가 먼저 경순에게 청혼하였던 것까지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 집에서 듣지 아니할 때에 그만 두든지 아주 그만 두기까 지는 않더라도 바싹 조르지만 말고 이때까지 천연만 하였더 라도 좋았을 것이 아닌가? 하여서 적지 아니한 불안을 느꼈 으나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은, 성숙의 누이동생을 자 기가 보지 못 하였은즉, 과연 재덕이 겸비한 미인으로서 경 순보다 나으냐 못하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한 줄기 의 의심으로서 창수로 하여금 마음을 몹시 아프게까지는 하 지 못한 것이었다. 만일 성숙의 누이동생이 성숙의 말과 같 이 출중한 인물로서 경순보다 나은 것을 자기의 눈과 마음 으로 발견하게 되는 때에는,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고치 기 어려운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창수는 성숙의 누이동생이 그다지 훌륭한 인물이 아니었으면, 다소 미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흠절이라도 있었 으면, 차라리 자기 마음이 위로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한편 으로 궁금하여서 하루바삐 보고 싶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구시월, 도지를 신고 다니는 검은 구름은 동풍에 몰려서 굵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당장에 무슨 살풍경을 일으 킬 듯하다. 경순과 창옥은 아까 남겨 두었던 밤송이도 발르 고 산보도 하다가, 졸연히 변하여지는 날씨에 놀라서 급히 돌아와 모든 것을 수습하였다.

"오빠, 가세요. 비가 오시는데."

하고 창옥은 경순과 함께 정거장 쪽으로 향한다. 성숙은 조금 뒤에서 창수와 같이 뒤를 따라갔다. 습율 대회의 많은 사람들도 모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