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개인 적은 비는 다시금 가을빛을 새롭게 하였다.
나비의 꿈인 듯한 코스모스의 가볍고 깨끗한 모양이 아침 볕에 새로운 키스를 이기지 못하여, 온몸을 움직이고 있는 한편에 처음 핀 국화의 송이송이에 맺혀 있는 이슬 방울이, 바로 보면 은(銀)인 듯하다가 비껴 보면 금인 듯도 하였으 나, 맑은 바람이 지나간 뒤에 다시 보면 그것은 은도 아니 오 금도 아니오 이상한 수정이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마음도 없이 가을 향기를 맡으면서 문지 도리를 의지하고 고요히 서 있는 스무 살이 될락말락한 예 쁜 여자는 잊었던 일을 깨우친 듯이 빠르면서도 한가하게 몸을 돌리면서, 갓 마친 단장을 거울에 비춰서 가볍게 두어 번 손질한 뒤에, 삼층장 위에 놓여 있는 바느질 그릇을 내 려놓고 다시 장문을 열고 무엇인지 꺼내려 할 즈음이었다.
"경순(敬淳)씨, 오늘도 또 바느질이요?"
하면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창수(昌洙)의 말소리는 명랑하 였다. 창수를 미처 보지 못하고 말소리만 들은 경순은 조금 놀라면서 둘러보더니 다시 웃는 입술로,
"여자가 바느질이나 하지 그럼 뭘 해요."
하고 장 안에서 하다 두었던 모시 진솔 두루마기를 꺼내어 놓는다.
"여보, 오늘 일기도 좋고 여러 날 바느질하노라고 갑갑도 할 터이니, 우리 밤이나 주워 먹으러 갑시다."
창수는 문지방에 두 손을 짚고 서서 경순을 바라보고 말한다. "밤을 주워 먹으러 가다니요?"
하고 경순은 무슨 말인지 의미를 모르는 듯이 돌려 물었다. "밤 주워 먹는 것 모르오? 나무에 열린 밤을 따서 주워 먹 는단 말이요."
"어디 가서요?"
"안양(安養)으로 간답니다."
"안양이 어디여요?"
"안양이 수원(水原) 못미쳐 있는데, 경성역에서 차를 타면 몇 정거장 아니 가서 내리게 됩니다. 잇수로 말하면 한 육 칠십 리 될까?"
"거기 밤은 임자가 없나요?"
"왜 없어요? 다 있지요."
"임자가 있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주워 먹어요?"
"남의 것을 거저 먹을 수가 있나요? 돈을 주고 몇 나무를 사서 따먹는 거지요."
"예!"
하고 경순은 비로소 밤 주워 먹으러 간다는 의미를 알았다 는 듯이 마음의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누구 다른 이들도 가나요?"
하고 물었다.
"오늘 ○○ 신문사 주최로 습율 대회(拾栗大會)를 하는데, 거기에는 여자만이 참가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 기 참가할 것 없이 가기는 같이 가더라도, 따로이 밤나무를 사서 우리끼리만 따가지고 옵시다."
하고 창수는 가기를 재촉하였다.
"신문사에서 가면 여러 사람이 갈 터인데, 남부끄럽게 같이 갈 것이 무엇 있어요. 가려면 훗날 따로 가는 것이 좋지."
하고 경순은 갈 생각은 있으면서도 여러 사람이 가는 중에 같이 가기를 수줍어하는 듯하였다.
창수는 밤줍기 놀이가 수년래로 각 신문사에서 한 해에 한 번씩은 반드시 주최하는 일로, 서울의 여자로서는 거의 상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경순은 아직 그러한 일을 모르고 여러 사람과 같이 가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을 볼 때에, 조금 갑갑하고 불쾌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학생출 신이 아닌 구식 여자로서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나하고 같이 가는데. 그리고 창옥이도 갈 터인데 어서 옷이나 갈아 입우."
"창옥이도 가요?"
경순은 신문사 주최로 여러 사람이 간다는 말에 조금 주저 하다가, 창옥이도 같이 가게 된다는 말에 새로운 용기를 얻 어서 조금 크게 뜨는 눈에 웃음의 흔적을 띠었다.
"그럼, 창옥이를 이리로 오라고 했으니까 곧 올걸. 어서 옷 이나 갈아 입어요."
하고 창수는 사랑스러우면서도 웃지도 아니하고 짐짓 엄숙 한 듯이 재촉하는 빛을 짓는다.
"그럼 문 닫고 저리 가세요."
하면서 방긋이 웃는 경순은 문 닫고 가라는 의미를 모르는 듯이 그대로 서 있는 창수를 보면서,
"어서 문 닫고 저리 가세요, 옷 갈아 입게요."
하고 의장문을 연다.
"원 별소리가 다 많아. 옷 입는 것쯤 보면 어떻담."
하고 창수는 영창을 비뚤어지게 닫은 채로 돌아서면서 성 냥을 그어서 궐련에 불을 붙인다.
"언니."
하고 대문간에서부터 소리를 지르고 들어오는 창옥은, 창 수가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오빠 왜 혼자 있우? 언니 어디 갔우?"
하고 너무 빨리와서 가쁜 듯이 숨을 돌린다.
"방에서 옷 입는단다. 너 좀 들어가서 옷 좀 입혀 줘라, 어 서 가게."
하고 창수는 방문 편을 돌아보며 소리 없이 웃는다.
"에그 오빠두, 언니가 왜 옷 입을 줄 모르나? 너무 맵시있 게 입어서 걱정이라나."
하고 창옥은 종종걸음으로 가서 영창을 방긋이 열면서,
"언니 옷 입으시우? 찬찬히 입어요, 오빠 말 듣지 말고. 차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하고 시계를 쳐다보더니,
"나는 오빠가 얼른 오라고 야단하는 바람에, 옷을 되는 대 로 입고 뛰어왔더니 어떻게 되었나 모르겠어."
하고 자기의 옷 입은 것을 살펴보더니,
"나도 들어가서 조금 고쳐 입어야겠군."
하고 창수를 돌아보고 웃더니, 뒷마루에 놓았던 핸드백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서는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더 니, 다시 작은 웃음 소리가 난다.
큰걸음으로 뜰 앞을 거닐면서 시계를 내어 보고 혼잣말로,
"허 이거 망건 쓰다 장 파하겠군."
하고 창수는 타다 남은 궐련 깍대기를 손도 대지않고 혀끝 으로 밀어서 마당에 떨어뜨린 위에 발로 밟아서 썩썩 비빈다. "오빠는 사내라도 양복 입을 때 보면 넥타이를 매었다 풀 었다 하고, 면경을 요리조리 보면서 한 나절씩이나 입으시 면서, 남의 흉을 잘 보시지. 여자 옷 입는 것이 그렇지두 않 을까 뭐."
하는 창옥의 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들리더니, 경순의 소곤 거리는 소리가 난 뒤에 다시 두 사람의 웃음 소리가 난다.
"자 어서 가세요, 재촉만 하지 마시고."
하고 창옥이 앞에 나오자, 웃는 입술을 다 다물지 아니한 채로 뒤를 따라나오는 경순은, 고개를 숙여서 자기의 치마 앞과 발등을 다시 보더니, 흐르는 눈으로 창수의 기색을 살 펴보고 다시 얼굴빛을 고친다.
서늘한 듯하면서도 따스한 가을의 아침 볕은 그들의 새 단 장을 비춰 주어서 무슨 뜻이 있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