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76: 6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