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71: 1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