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다.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