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64: 1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