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63: 9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