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56: 2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