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