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52: 2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