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