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