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47: 1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