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46: 4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