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