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26: 1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