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2: 2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진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쪽진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오는지 부르걷은 고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차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