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 이광수

Chapter 15: 3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