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 나도향

Chapter 5: 五

춘우는 영숙의 집에서 온지 닷새만에 편지 한 장을 받았 다. 그것은 영숙에게서 온 것이었다. 춘우가 이 편지를 받았 을 때, 그의 가슴과 손은 돈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떨리었다.

피봉을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그는 다시 책상 위에 놓고, 고개를 기우리고 생각하였다.

『저 속에 무슨 말을 썼을가?』

그러다가는 다시 들어 봉한 것을 뜯고서, 속의 편지를 펴 들을 때, 그의 가슴은 이상하게 두근거리었다. 그의 두 눈에 서는 경이(驚異)의 광채가 나서, 그 광채가 편지 글씨를 점 과 선마다 그대로 뚫을 것 같았다.

춘우씨에게 두어마디로 아룁니다. 옛날의 영숙이가 아닌 저로서, 춘우씨를 만나보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춘우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실터이지 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오는 일요일 하오 두시 에 청량리로 와 주셔요. 제가 춘우씨에게 꼭 한 말씀을 할 것이 있으니까요. 긴 말씀은 하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칠월이십오일 영숙 올림 춘우는 이 편지를 들고 한참이나 눈앞에 있는 시계가 돌아 가는 것을 들여다 보고만 있었다. 새발향(丁香)의 그윽한 냄 새가 도는 영숙의 편지를 한 손에 움켜쥐고서 눈 하나 꼼짝 거리지 않고 앉았을 때 그의 가슴은 공연히 괴로웠다. 그는 혼잣말로

『사랑이냐?』

하다가, 다시 혼자 냉소하듯 웃음을 나타내고, 편지를 들여 다 보며,

『아니지!』

하여 보았으나, 그는 「아니지!」하는 말이 채 떨어지기 전 에 그의 가슴은 알수 없는 비애로 찼었다. 그는 편지를 다 시 읽으면서,

『나를 사랑한다하면 내가 어떻게 할터이냐!』

혼자 생각을 하다가, 그 대답으로

『사랑은 아니겠지!』

할 때, 그는 편지를 내던지고, 팔 위에 고개를 얹고서 아무 말 없이 자는 사람처럼 있었다.

『사랑이냐? 아니냐?』

자기 가슴 속에는 타는 사랑이 영숙에게도 있을리는 없을 줄 알았던 춘우가 영숙의 편지를 받아들고 생각할 때 헤매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영숙은 나에게 이런 편지를 하였을고? 얼마나 대 담한 일이냐! 만일 자기가 참으로 만나고 싶고, 한때라도 이 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하였다 하면, 나는 이 편지 를 도루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영숙은 남편있는 사람이다. 만일 영숙이가 나로 말미암아 죄를 짓는다 하면, 그 죄는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죄를 지으 면 지을지라도 남에게 죄를 짓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편지를 뜯은채로 다시 피봉에다 넣었다. 그래 가지고, 겉봉을 쓴후 책상 머리에 놓고, 자리위에 누웠다. 그러다가 는 다시 고개를 내저으면서,

『만일 사랑이 아니고 다른 일이라하면?』

뒤빕어 생각을 하여 보고서,

『나는 영숙의 옛날 동무가 아니냐? 나의 가슴속에 영숙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영숙이가 나를 생각하는 줄로 오 해를 하는 것이지.』

춘우는 설합을 열고 편지를 집어넣었다.

일요일이 되어 춘우는 청량리 정거장에서 내렸다. 청량리 어디란 말도 모르고 막연한 목표를 향하여 춘우는 걸어간 다. 바람에 휘말려서 춤추는 녹음은 땀나는 얼굴에 시원한 바람을 실어오고, 진하고 엷고 누르고 푸른 풀들은 멀리 산 밑 언덕을 옷입혔다. 서늘하게 우는 매미는 높은 가지에서 첫 가을을 노래하고, 두 나래를 벌린 잠자리는 물결 위에 뜬 배 모양으로 높았다 낮았다 한다.

춘우는 웃옷을 벗어 들고, 수건으로 땀을 씻었다. 푸른 비 단을 땅 위에 깔고, 그 위에 하얀 줄을 아무렇게나 쭉 그은 듯한 길 위에는 풀냄새와 섞이어 한적한 공기 위에 떠돌고 맨발을 벗고, 다리를 걷어올린 어린아이는 손에다 거미줄친 잠자리채를 들고서 나무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든다.

춘우는 청량리로 발을 들여놓고, 비로소 막연함을 깨달았 다. 넓은 청량리에 어디서 만나자는 말인가?

춘우는 절로 들어섰다. 이 초막 저 초막 길 위로 올라섰다, 다시 길 아래로 내려섰다. 이 집에도 고개를 기웃, 저 집에 가서도 발을 머뭇, 그러나, 영숙을 보지는 못하였다. 여자의 신이 놓인 곳을 살펴보고, 파라솔이 있는 곳에서 물었으나, 모두 아니었다.

그는 다시 소나무 틈을 이리 꿰뚫고 저리 꿰뚫어 모래가 미끄러지는 산등에 올라서 아래로 내려 살피었다. 먼 곳에 서는 전차 가는 소리가 가늘게 바람을 따라 들려 올 뿐이 요. 나무 사이에는 돌아가는 사람의 옷자락이 보이었다. 살 아지었다 할 뿐이었다. 춘우는 모래 위에 앉아서 멀리 서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사면이 적막함을 따라 그의 마음은 잿물 속에 들어간 빨래 처럼 씻어지는 듯하고, 혼탁하던 머리가 무엇으로 걸러놓은 것처럼 밝아지는 듯 하여 올 때, 그는 혈관 속으로 무슨 새 생명이 스미어드는 듯 하여 두 팔을 들었다 놓았다, 가슴을 벌리었다 좁히었다 하였다.

삼십분이 지나갔다. 쉬임 없는 시간은 사십분, 오십분, 한 시간이 넘었다. 춘우는 산위로 올라갔다, 우물가로 내려갔다 하였다. 그러고는, 속으로 홀로 어디가 들어 앉아 기다릴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다시 의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웬일일까?』

하고, 그는 한번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편지를 또 다시 꺼 내어 들고 자세히 살펴본 후,

『나를 공연히 속이지는 않았으렷다.』

하다가는, 다시

『그렇지만, 어째서 여기서 만나자고 하였을까?』

안개 같은 감정이 그의 가슴에서 이리 서리고 저리 엉클어 진다.

『나를 만나서 무엇 하려는가?』

춘우는 다리로 기어드는 개미를 골난 사람 모양으로 탁탁 털더니, 다시 걷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알수 없는 의혹 속에서 한밤중 먼 촌에서 반짝거리 는 불빛 같은 희망이 그의 가슴 속에서 탔다 살아졌다 할 때, 그는 정처없이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다가는 어디서던 지 영숙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는 옛적 홍릉 쪽을 향하여 갔다. 구부러진 길가에는 원 추리(宣男草)가 고개를 쳐들고 노란 웃음을 띠우고 있고, 철 잃은 할미꽃은 고개를 숙이고 말 없이 있는데, 창부의 입술 같은 꽃잎 속에는 노란 이가 보이었다. 범나비가 오른쪽 숲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나오더니, 춘우의 허리 옆을 스 치고, 다시 왼쪽 숲속으로 들어가 버리었다.

춘우는 목이 몹시 마름을 깨닫고 약물터로 향하는 좁은 길 로 들어섰다. 집을 넘는 옆에 나뭇가지 들이 뺨을 때리고 얼굴을 긁어 잡아 다닌다. 그러고는 피다가 스러지는 이름 모를 꽃들이 춘우의 발 밑에 무참히 을크러지고, 발등에선 푸른 메뚜기 송장메뚜기가 재주를 부린다. 춘우는 저도 모 르게 돌아다닌다. 물가에 가서 손으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물 먹으러 온 사람 무엇이 아무 말 없이 물만 먹고, 두던 위로 올라가 버리었다.

춘우는 마음을 놓고 물묻은 수건으로 얼굴을 씻을 때, 누 구인지 자기 뒤에 서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더니, 가는 기 침 소리가 들리며, 자기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 전에

『춘우씨.』

하는 목소리는 꿈에 듣는 듯한 영숙의 소리였다. 춘우는 반가웠다. 그러다가 원망스러웠다.

벌떡 일어난 춘우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때, 영숙은 어 깨에 걸었던 파라솔을 접으며

『퍽 오래 기다리셨지요?』

할 때, 춘우의 눈에는 조금도 서둘르고 주저하고 부끄러워 하는 점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춘우의 가슴은 공연히 물결 치고 가늘게 떨렸다.

『아뇨, 별로.』

그의 말은 기다리고도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오셨기에 이리 오셨어요?』

두 사람이 말하는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근질근질함이 있 었다. 춘우는 그 근질근질함을 없애고 싶어서, 그곳을 떠나 려 하여 모자를 쓰며,

『더워서 물을 좀 먹으러 왔어요.』

하고, 저리로 가려 하니까, 영숙은

『그러면 저도 물 좀 먹구요.』

하며, 파라솔을 땅 위에 놓고서 우물로 가까이 갔다.

『바가지가 없습니다.』

춘우는 제집 우물이 아니건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였다.

『없으면 어때요. 손으로 먹지요.』

하며, 매끈하고도 하얀 두 팔을 걷고서 두 손을 모아 물 속에 넣더니, 손가락을 좁히어 표자를 만들었다. 그러고 물 을 퍼서 먹을 때 춘우의 눈에는 상아로 만든 표주박으로 무 슨 경장을 마시는 님프와 같이 보였다. 영숙은 한숨을 쉬고 두 손을 수건에 씻더니, 붉은 입술을 적신 수정 같은 물방 울을 씻었다.

물을 다 먹더니, 다시 양산을 들고서 언덕으로 올라섰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때, 영숙은 가 끔 입속으로 노래를 웅얼거리는 것이 아주 마음 편한 사람 같았다. 춘우는 그와 반대로 가슴 속이 무엇을 기다리는 사 람처럼 거북하였다. 춘우는 영숙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 기를 기다리고, 또 이 자리까지 자기를 부른 뜻을 알고 싶 었다.

얼마 가다가 영숙은 아카시아 그늘 속을 지날 때 비로소 처음으로 춘우를 보고 무슨 말을 할 듯이 서 있었다. 영숙 의 입술은 잠간 떨리더니, 말이 새어 나오는데,

『춘우씨가 저의 말을 꼭 한마디 들어 주시겠어요?』

하고, 사면을 살피더니, 저쪽에 누가 있는 듯 하니까, 다시 양산만 빙글빙글 돌리면서 걸어간다. 춘우는 그 뒤를 따라 가면서,

『무슨 말씀얘요?』

영숙은 대답이 없었다. 춘우는 자기 말에 대답이 없으므로 무색함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이 은근히 더워지는데, 영숙은 옆에서 푸르륵 나는 방아깨비를 치어다 보며,

『에그, 저것 보게 하늘로 자꾸 올라갑니다 그려. 저것이 무엇이어요?』

춘우도 그것을 바라보며 힘없는 소리로,

『방아깨비 아닙니까?』

영숙은 또 말이 없었다. 갑자기 침울한 얼굴로 땅을 내려 다 보면서, 열댓 걸음 걸어가더니, 무엇을 결심한 사람처럼 쓱 돌아서며,

『우리 저쪽 큰길로 가시지요.』

하며, 손가락으로 큰 길을 가리킨다. 춘우는 다만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영숙의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듯이 큰 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오던 길을 다시 가던 영숙은 팔뚝에 감긴 시계를 보더니,

『벌써 네시가 넘었네.』

하고, 깜짝 놀래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재빨리 걸으면서

『여기서 전차 정류장까지 몇분이나 걸릴까요?』

춘우는 영숙이 황망해 하는 것을 보고서,

『왜 무슨 약조하신 것이 있습니까?』

영숙은 약간 고개를 숙이더니

『아뇨, 별로. 약조한 것은 없지만, 너무 늦으면 집에서 기 다릴 터이니깐 말씀얘요.』

하며, 양산 끝으로 땅을 판다. 춘우는 겨우 말을 가다듬어,

『그런데 아까 제게 말씀하시겠다는 것은 무엇이십니까?』

『그것요?』

영숙은 영롱한 눈으로 춘우의 얼굴을 쳐다볼 때, 그의 눈 에는 애원하는 듯한 빛이 있었다.

『춘우씨는 저의 십년 전 친구지요? 저를 아무 허물 없는 누이처럼 생각해 주시지요?』

『그런 말씀은 다시 하실 것이 없지요. 저는 영숙씨에게 다시 없는 친구며 오라비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그러면 춘우씨는 저의 지금 형편을 동정하시겠지요?』

춘우의 입에서는 나올 말이 없었다. 무엇이라고 대답하기 가 싫었다. 영숙은 말을 계속하여

『저는 참으로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저의 일생은 쓸쓸한데서 시작하여 쓸쓸한 곳에 그칠 것 같아요. 저는 춘 우씨에게 그것을 동정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하고 싶어요.』

하더니, 두 눈에 비애의 그림자가 끼이며, 한참이나 기운 없이 있다가, 잠꼬대같은 소리로

『그러나 그러나.』

하고 고개를 흔들면서,

『저 같은 여자가 춘우씨의 동정을 구하는 것도 과분한 일 이겠죠.』

춘우는 고개를 들고 힘있는 어조로,

『동정해 드립니다. 저의 모든 정열(情熱)과 정성을 다하여 동정해 드립니다. 나는 영숙씨의 비애를 알고, 번민을 압니 다. 영숙씨! 우리는 옛날 어렸을 적으로 다시 돌아갈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영숙씨가 만일 우리 집 뒷동산에서 하시던 말씀을 잊어버리시지만 않으셨으면, 우리는 귀여운 옛날의 순결하고 때묻지 않은 우리를 다시 이을 수 있을 것이지요.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시지요.』

영숙도 흥분된 말로

『압니다. 어렸을 적에도 저의 친구는 춘우씨 하나 밖에 없었고, 오늘에도 춘우씨 한분밖에 없습니다. 춘우씨는 저 를……』

하고 아무 말이 없다.

『그러면, 오늘부터 반가운 동무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무엇이든지 서로 말하는 친구가 되었지 요?』

춘우의 가슴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정열의 물결이 치고 영 숙은 자기 몸을 누구의 팔에 맡긴 듯 하였다. 두 사람의 얼 굴에는 은반(銀盤)에 비친 불볕 같이 번득거리는 희망이 비 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송림 사이로 들어섰다가, 다시 모래 톱으로 내 려섰다가, 물가로 거닐다가, 다리를 건느고 잔디 위에 앉기 도 하였다.

영숙은 다시 춘우를 이끌고 절로 들어가 밥을 사먹고 나니 까 날로 저물었다.

여드렛날이 바다와 같은 하늘 위에 떠 비뜨름히 두 사람을 내려다 볼때, 이슬 묻은 축축한 바람이 영숙의 치맛자락을 살짝 날리게 한다. 우뚝 선 장승은 머리 위에서 흔들흔들 하는데, 풀 사이 나무 틈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제가끔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암흑에 싸인 숲들은 새파란 하늘 빛 과 흐르는 달빛 속에 점점 그 빛이 진해간다. 먼 하늘에는 감았던 눈을 뜬 것처럼 하나씩 둘씩 금강석 같은 별이 반짝 인다. 끼었던 안개는 사면으로 흩어지어 한폭의 장막을 휘 두르는 듯이 좌우 산허리에 잠겨 있고, 땅 우에는 달에 비 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넓지 못한 산길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 길을 걷는대로, 영숙의 부드러운 살을 가린 한 겹 모시 적삼이 춘우의 양복 입은 살 위에 닿다가 떨어지었 다 할 때마다 두 사람의 혈관 속에 가득 찬 정열은 식었다 더웠다 하는 듯하였다. 춘우의 코에는 영숙의 머릿기름 냄 새와 얼굴에 바른 분 내음새가 이슬묻은 공기와 함께 콧 속 으로 스미어들 때 무슨 마취제(痲醉劑)를 마시는 듯이 흥분 됨을 깨달았다. 자박자박 마른 신 신은 발이 모래 위로 걸 어가는 소리까지 춘우의 가슴 속에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노래의 박자를 맞추는 듯 하였다. 춘우는 흥분이 변하여 대 담하여 졌다. 그는 끝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영숙의 손을 잡 았다. 영숙은 균일하게 걷던 발을 딱 멈추더니, 춘우의 얼굴 을 쳐다 볼 때, 그의 두 눈은 불과 같이 번득거리었다. 그리 고는, 잡은 손을 송충이나 떨어버리는 것처럼 홱 뿌리치며,

『이게 무슨 짓이셔요.』

목소리는 날카롭게 떨리었다. 춘우는 자기 얼굴이 불같이 타는 것을 깨닫고, 꿈 속에 선 사람처럼 말 없이 섰었다. 영 숙은 고개를 숙이고,

『춘우씨는 저의 친구얘요. 오라버니얘요. 저의 손목을 잡 으실 수 없는 몸얘요.』

하고, 돌아섰다. 춘우는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잘못 했습니다. 친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영숙 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지요?』

『용서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다시는 그런 일은 하지 말아 주셔요. 저는 남편이 있는 사람얘요.』

『알았습니다.』

춘우는 갑갑해 못 견디는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은 듯한 팔짓을 하며

『알았어요. 세월은 못 속입니다.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 습니다. 나는 우리가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절대로 못 돌아 갑니다.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자 하는 것은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꿈 속이나 생각으로는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을지라도 분명하 고 똑똑한 현실로는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영숙은 다만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춘우는 성이 나서 돌아선 영숙의 뒤로 달려들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모든 것을 자백하는 듯이 뜨겁고 힘있는 목 소리로,

『영숙씨! 저는 당신에게 참으로 무례한 사람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으로 벌써 당신에게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숙의 고개는 갑자기 돌려지며 놀래는 사람처럼 춘우를 보고 다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춘우는 뒤를 따 라갔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만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무엇을 받으려하지는 않습니다.』

영숙은 달아날 듯이 걸음을 급히하며,

『그런 말씀은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저를 따라오지 마셔요. 저는 그런 말을 듣기 싫 어하는 사람얘요. 그러고 만일 그 말씀이 참말이시거든, 춘 우씨는 마땅히 단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단념하십쇼. 그러 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 오시는 것과 저와 만나시는 것을 고만 두어 주셔요. 당신을 나쁘게 인정하고 이런 말씀을 하 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더니,

『자, 아무 염려 마시고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혼자 갈터이니.』

하고, 혼자 걸어간다. 춘우는 황망한 듯이,

『아니 전차 정류장까지 바라다 드리지오.』

하며 따라가니까

『아네요. 아무 염려 마셔요. 저 혼자 가도 아무것도 무서 울 것이 없어요.』

『그렇지만, 호젓한데.』

『호젓하지 않아요. 저는 저의 믿음이 있습니다. 어디던지 갑니다. 』

하더니, 성낸 얼굴에도 탄식하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뜻밖에 만났다가 그런 말씀 때문에 쉽게 떨어지 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매, 참으로 섭섭은 하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춘우는 이 말을 듣더니,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가 없을까요?』

『그렇죠. 춘우씨의 가슴 속에서 그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는 언제까지든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못 만나게 될지라도……』

『영원히요?』

영숙의 말소리는 중단이 된다.

『그래요.』

또 다시 한참 있다가,

『그것이 영원토록 당신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으신다면 영원토록 이기겠지요. 그러나 내일이라도 그 마음이 사라지 신다 하면, 내일이라도 만나뵐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춘우의 가슴은 거북하였다. 영숙을 사랑하면 영원히 못 만 나고, 사랑하지 않으면 만날 수 있다. 아아, 세상은 모순이 었다.

영숙은 따라오는 춘우를 괴로운 듯이 돌아다 보며,

『자, 나를 위해서 이 자리에서 가 주십시오. 먼저 가셔요.

그러고 영원토록 만나뵙지 않게 해주셔요.』

춘우는 한참이나 장승처럼 서 있다가

『가지요. 그리고 영원토록 만나뵙지 않지요. 그러면 안녕 히 계셔요.』

하고 두 팔을 양복 주머니에 찌르고서 힘 없는 걸음을 내 어놓을 때, 한참이나 있던 영숙은 춘우를 다시 부르며,

『춘우씨!』

하고, 그 자리에 섰다. 춘우도 고개를 돌리었다. 영숙은 춘 우의 대답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춘우는 참으로 영숙 의 목소리로 자기를 불렀는지 의심이 나는 것처럼, 다시 영 숙이 부르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음을 듣고, 다시 돌아서 가려 하였다. 영숙은 돌아가는 춘우를 보더니,

『춘우씨, 춘우씨!』

부르면서 두어 발자국 나서더니,

『춘우씨!』

하며, 다시 부를 때, 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소리였다. 춘 우는 돌아선 채, 영숙의 오는 것에 바라보고만 있었다.

『춘우씨, 내일 다시 만나 게하여 주셔요. 춘우씨가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다 내버리시더라도 내일 다시 만나뵙게 만 하여 주셔요. 다시 만나뵈어야 하겠어요.』

춘우는 굳세고 엄한 소리로

『저는 그렇게 가볍고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다시 만나 뵈올 수가 없어요. 한번 만나 뵈옵 두 번 만나 뵈옵고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하야 저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 는 영원한 생명인 사랑을 내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죠.

그리고 영원히 당신을 뵈옵지 않죠. 사랑은 고통에서 고통 에 끝나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발길을 돌리어 저쪽으로 걸어갈 제, 영숙은 그 뒤를 따라 가며,

『참말 영원히 가시렵니까? 영원히 만나뵙지 못할까요.』

춘우는 하늘만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이 섰다가,

『내가 가죠. 나 하나만 가면은 모든 것은 해결될 것입니 다. 나 하나만 괴로우면, 나 하나만 아픈 가슴을 쥐고서 쓸 쓸한 가운데서 지내면 모두 다 행복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두쪽 수풀 속에서는 푸른 빛 하는 반딧불이 요리 지나고 조리 흐른다. 때때로 흔들리는 나뭇잎에서는 달빛에 번득거 리는 이슬이 풀 위에 떨어지어 굴른다. 사면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다만 두 사람을 보는 것은 씻은 듯한 하늘에 은 반 같은 달 뿐이었다. 영숙은 춘우의 가슴을 붙잡았다. 그러 고 고개를 그 위에 실었다. 춘우는 나무때기 모양으로 꿋꿋 이 서 있을 때, 영숙은 눈물 섞인 목소리로,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일지라도, 춘우씨의 말 하 나만 참말이 되게 하여 주셔요. 지금에 이 자리가 꿈도 아 니고 환영도 아닌 참말이 되게 하여 주셔요. 그러고 알 수 없는 괴로운 경우에서 저를 끌어 내어 주셔요. 네! 춘우씨!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하는 영숙은 몸을 탁 춘우의 가슴에 실었다. 춘우는 두 팔 로 자기에게 실리는 영숙을 끼어 안으며,

『고맙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 나, 영숙씨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영숙씨는 다른 이 를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

하고, 고개를 숙여 자기 팔에 안긴 영숙의 얼굴을 내려다 볼 때, 옥 같이 흰 얼굴에는 달빛이 비치어 한층 창백해 보 이는데, 그린듯한 눈썹만 분명하게 까맣다. 그리고 섬세한 머리털이 이마 위에서 헛날리고, 담은 입술이 말 할 수 없 이 예뻤다. 영숙의 허리를 두른 자기 팔이 영숙의 가슴 밑 을 지낼 때, 힘 있게 뛰는 심장이 춘우의 팔을 흐르는 혈관 과 부디치어 그 고동을 자기 심장에 전하고, 그 여파가 다 시 전신에 퍼진다. 춘우는 술 취했을적과 같이 태탕한 기운 이 얼굴에 올라왔다.

영숙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네요. 아네요. 없어요. 참으로 참으로 없어요. 저는 여 태까지 참으로 남의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하였고, 주어보지 도 못하였어요. 춘우씨! 그렇지만 저는 춘우씨를 사랑하지 못할 사람야요? 춘우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예요.』

『그런 말이 아니지요. 나는 결코 당신의 사랑이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을 압니다. 영숙씨는 영숙씨의 주인이 있습니다. 』

『없어요. 나의 몸의 주인은 있어도 나의 영(靈)의 주인은 없었어요. 저는 이제 그 영의 주인을 얻었어요.』

『영의 주인을 얻었다구요?』

춘우는 팔에다 힘을 주며,

『그 주인이 참으로 주인 노릇을 할 수가 있을는지 의문입 니다. 』

『아네요. 저는 그 주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무슨 짓이던지 하겠습니다.』

춘우는 꿈꾸다 일어난 사람처럼 영숙을 보더니,

『천천히 가시면서 말씀하시지요.』

하고, 팔에 실린 영숙을 이끌어 가지고 걸어간다.

『모두 다 알았습니다. 꿈 같이 받은 은혜가 또한 꿈 같이 사라질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꿈 같은 은혜를 받지 않는 것도 무정한 사람이겠죠.』

『저를 의심하지 마셔요. 꿈이 아닙니다. 참말입니다. 저는 새로운 세상에서 참으로 사람다운생활이 하고 싶어요. 저는 아직까지 사람답게 살지를 못해요. 저는 물건이나 장난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