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춘우의 동료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아다니었다.
『춘우가 요사이는 퍽 침울하여졌어?』
『글세 나도 퍽 이상하게 보는 중야.』
『그 까닭을 자네들은 모르나?』
『모르지.』
『허허, 실련야, 실련.』
『조금 같이 지내는 여자가 있지 않은가?』
『그래, 그 영숙이 말이지?』
『옳지!』
『그것이 왜 그만 냄새가 난다고 한 모양일세 그려.』
『어떻든 세상은 돈 있어야 하겠네. 사랑의 마지막 승리는 돈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말데.』
『그것을 인제야 알았나!』
『인제 안 것은 아니지마는, 언제든지 진리인 것을 어찌하나.』
『그럼, 그 승리자란 대관절 어떤 사람야.』
『그 승리자 말인가. 전라도 부자로 년전까지 같이 지내다 가, 춘우에게 영숙을 빼앗겼었지 그러다가 다시 지금 얼려 붙기를 시작한 모양이야.』
『이름이 무엇이람?』
『압다 이 사람아, 일전에 내가 교동 모퉁이에서 자네더러 자세 봐두라고 그러지 않든가?』
『응응.』
『그 사람야 바로.』
『옳지, 윗수염 까맣고 얼굴이 둥근 그 사람 말이지.』
『그래.』
『그렇지만 춘우가 돈은 없어도 사람은 퍽 얌전하고 귀염 성스러운데.』
『얌전하고 귀염성스러우면 무엇을 하나? 돈이 있어야지.』
이처럼 만나는 대로 춘우의 친구들은 춘우와 영숙의 소문 으로 서로 찧고 까불제, 춘우는 벙어리 모양으로 말이 없이 자기가 일보는 회사 책상 앞에서 자기의 맡은 일반 볼 뿐이 었다.
붓을 잡는 것도 시덥지 않고, 남과 이야기 하는 것도 귀찮 아서, 다만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앞만 내다보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는 몹시 고적함을 느끼었다. 자기의 주위에서 모든 것을 누가 빼앗아 간것 같이 그는 적적하였다. 그러할수록 그에 게는 공포(恐怖)의 마음이 생기었다. 자기가 어떠한 깊은 산 이나 넓은 들에서 혼자 지내가는 듯이 외롭고도 무서웠다.
그 무슨 무거운 것이 자기이 머리에서도 누르고 가슴에서도 누르는듯 하였다. 그러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하나, 아니 미 끄러지지 않을 수 없는 수렁가장자리로 자기가 차차 들어가 는 것을 느끼었다.
영숙과 자기의 힘으로는 헤쳐버릴 수 없는 구름을 만지려 하나 만질 수도 없고 보려하나 분명히 볼 수도 없이 가리어 있는 것을 생각하자,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예전에 즐겁던 날을 생각하고, 오늘에 이것을 헤아리매, 알 수 없는 사람의 살림살이가 더 한번 알 수가 없었다.
한강이 뽀트놀이며 청량리에서 처음 만나 꿈 같은 사랑의 마음을 서로 속삭일 때와 효창원의 봄놀이, 짧으면 짧다 할 수 있으나 일생의 잊지 못할 새로운 살림살이의 즐겁던 것 이 오늘에 거품을 쥐는 것이 사라지려하는 것을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리지 않을 수 없이 감개가 무량하다.
나의 사랑이 엷어졌느냐! 영숙의 사랑이 식었느냐! 영숙을 잊어보려고 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잊으려고 하면 더 생각 이 나고, 보지 않으려면 할수록 더 보고 싶은 것은 사람의 힘으로 풀수 없는 수수께끼며, 밉고 질투스러울 때마다 더 마음이 어찌하여 타는지, 그것을 알려주는 열쇠를 아직 조 물이 우리 사람에게 주지를 아니한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러하고 저렇게 생각하면 모 든 것이 저런 것 같은 것이 사랑이요, 믿으면 눈이 딱 감고 믿어지며,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아도 수상하여 보이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 랑의 빛깔이다.
오늘에 춘우는 영숙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마는 속 이 공연히 타고, 영숙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이 보 이지 않는 것이 아니지마는 공연히 의심스럽다.
춘우는 혼자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영숙을 의심하는 것이 사실이니, 영숙에게 그 모든 의심스럽게 여기고 믿고 하든 바를 모조리 이야기하여 버린 후, 모든 것을 잊어버려 버릴 가! 그렇지 않으면, 영숙의 마음을 떠보고 모든 것을 탐지하 여볼가. 만일 내가 의심하는 바 또는 창하가 내게 일러준 것이 거짓말이라 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그것이 사 실이라 하면 어찌하랴. 그 때 춘우는 남자의 자부심이 몹시 상하여지는 듯 하였고, 또는 우열승패를 다투는 장사가 적 에게 몹시 모욕을 당할 때 그 마음과 같이 분함을 느끼었다.
『옳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속에다가만 넣고 우물쭈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 의 태도는 마치 채무나 채권을 가진 자들이 서로 앉아 청산 을 하여 받으려면 받고 탕감하는 것이나 똑같은 태도를 취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피차의 권리 의무가 있는 부채인 까닭이다.』
하고는, 첫째로 영숙이가 철수나 청아를 다시 보지 않겠다 고 맹세까지 하고서 어찌하여 철수에게 다니는 것, 둘째로 어찌하여 근자에 와서는 퍽 침울하여졌느냐 하는 것, 셋째 로는 그 돈 사십원의 출처를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 것, 이 세가지이다. 그러면 나도 내가 생각하였던 것은 모조리 말 을 하여 버리리라 하였다.
그날 저녁때 춘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말썽꾼인 친 구 몇 사람과 만났다.
그중에 나이 어리고 인물 예쁘장한 사람이 먼저 춘우의 손 을 잡고
『어디 가나?』
하며 새브렁거리는 말소리로 묻는데, 입에서 술냄새가 난다.
『집에 가네. 한잔들 했네 그려.』
하며 침울한 웃음과 함께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바꾸었다.
그중에 몸짓이 뚱뚱하고 로이드 안경을 버틴 친구 하나가 배창자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로
『집에 가서 와이프하고 재미있게 저녁을 먹는 것도 좋기 는 좋은 일이지마는, 우리같은 친구들하구 같이 먹는 것도 그리 무미할 것은 없겠지.』
『자, 가서 한잔 내게.』
하며 그 말을 받아서 말썽을 끄내는 사람은 그 중에 얼굴 이 가장 까맣고 술을 그리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춘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람들을 떼어 보내려고 나오 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웃어가면서
『글쎄 좋기는 좋은 말이지만은, 돈이 있어야지.』
하며 두손을 펴보았다.
『옳지, 핑계가 좋으니. 그렇지만, 자네가 정 사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술 한잔 내지 못하 겠나.』
하는 사람은 로이드 안경 쓴 사람이다.
『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만, 그런 말 말게. 춘우가 그럴 사람이 아니니. 낼 마음이 있으면 우리가 내라고 하기 전에 먼저 내는 사람이니까.』
서로 찢고 까부는 사애에 서서, 춘우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애원이나 하는 듯이
『정말 돈이 없네. 돈만 있으면 자네네들이 말하기 전에 내지.』
『거짓말 말게.』
『정말일세. 자, 보게.』
하고 지갑까지 끄내보였다.
사달라는 말을 먼저 끄낸 사람이
『정말가?』
하고 한참 섰더니, 머리에 얹었던 팔을 뚝 떼며,
『가세, 내가 한잔 내지.』
하고 일행을 잡아끈다. 춘우는 돈 없는 핑계나 해서 거기 에서 모면을 하려하였으나, 이 경우를 당하여서는 조금 난 처하였다. 그러나, 술 낸다는 친구가 술을 많이 먹을 줄 모 르는 사람인 까닭에 잠깐 먹고 얼핏 나오려 하고 그 뒤를 힘없이 휘우적거리며 따라갔다.
『어디로 갈까?』
『글쎄.』
『맥주나 한잔 먹어보세 그려.』
『맥주? 그까짓 것을 먹어야 취해야지 위스키나 브란디가 아니면 주량이 차지를 않을걸.』
자니네끼리 의논이 분분하다. 춘우는 그저 새끼에 맨 돌멩 이처럼 어디든지 가자는 대로 가리라 하고서 구경만 한다.
술 낸다는 친구는 돈푼이나 있고 놀기를 좋아하나, 원래 술은 먹을 줄 모르는 까닭에, 그 대신 여편네를 좋아한다.
그래서, 술집에 가자면 반드시 계집애를 보러 가는 것이며 술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요, 요리집에 가서 논다 하면 기생 없이는 놀지를 않는 사람이라, 지금도 자기의 애인의 볼 마음이 불현듯 나서 춘우 술 사준다는 핑계로 애인을 보 러 가는 것이다.
『요리집으로 가지.』
하며 로이드 안경에게 물어보았다.
『아직 일르지 않을까?』
『이르기는 무엇이 일러. 일직 가야 기생도 맘대로 부르지.』
『자네야 판에 박아논 기생이 있으니까 언제는 못 만나보 겠나.』
할 때 옆에서 이 말을 듣던 춘우가 만일 요리집에를 간다 하면 시간이 너무 늦어질 터인즉, 그리하지 말고 간단히 어 디 가서 술이나 몇잔 먹고 헤어지리라 하고서,
『요리집에는 가서 무엇을 하나 어디 청요리집에 가서 저 녁이나 먹지.』
하며 만류를 하려한즉 또 그 새부렁거리는 친구도 속심은 단단하여
『그러이, 그래. 돈 많이 들이고 그리로 갈 것 없네. 어디 가서든지 간단히 먹지.』
그러나, 그 말이 모두 성금이 서지 못하였다. 네사람은 명 월관지점으로 갔다.
방 하나를 치우고 들어앉아 있을 때 춘우의 마음은 술 먹 을 것이나 또는 놀 마음은 조금도 없고 다만 오늘 저녁에 자기 집에 돌아가서 어떻게 사랑의 셈을 따질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자기가 돈을 가지고 대금업자나 또는 이해타산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지 못한 것이나마 한가지로, 사 랑에 들어서도 그리 타산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자기를 알므로 여간한 결심을 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이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나 춘우는 다 만 한옆에 우두커니 앉아서 속만 혼자 조리고 앉아 있었다.
조금있더니, 기생이 들어왔다. 그 기생을 볼 때 춘우의 눈 은 뚱그래지며 가슴이 설렁하였다. 당장에 대들어서 손목을 보여주고 인사라도 하고싶었으나, 춘우는 그렇게까지는 단 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기생이란 옛날에 춘우더러 선생 님 선생님 하고 친하게 따랐으며, 자기가 시골로 갈제 용금 루 난간에서 눈물까지 흘려주던 설성월이었다. 기생 역시 춘우를 보기는 반갑고 놀라는 눈으로 보았으나, 고개를 다 른 곳으로 돌리어버렸다. 다른 기생이 또 하나 와서 술을 먹기 시작할 때는 벌써 방 안이 어둠침침하여질 때였다.
술들이 얼근히 취하더니, 서로 취기가 술잔이 왔다 갔다 한다. 로이드 안경은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기생을 더 럽게 건너다보며 잡담을 하고 앉았는데, 설성월은 그때까지 별로 이 말이 없이 좌석 주인 옆에 앉아 있다. 그는 무슨 난처한 일이나 있는 듯이 유쾌하지 못한 표정으로 술만 따 른다.
춘우는 술 먹을 생각보다도 집에 갈 생각이 더 많아서 여 내 시계만 꺼내보고 있을 때 깐죽깐죽하는 친구가 춘우를 보더니,
『시계는 왜 그렇게 보나?』
하며 옆으로 다가 앉아서 술잔을 주며,
『한잔 들게. 그러고, 나 한잔 주게.』
하며 술을 권한다.
『자네가 전에 일본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술을 잘 먹더 니, 요새 와서는 한동안 끊었었다지?』
『그랬었지!』
『예끼, 미친 사람. 술을 왜 끊나? 술처럼 좋은 것이 없데.
열정이 없는 사람이 향내나는 술을 먹으면 그저 가슴에서는 불보다도 더 뜨거운 열정이 솟아오를 것이요,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는 사람이 한번 마약(痲藥)같은 술잔에 입을 대이면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잊어버릴대로 잊어버릴 것일세. 울고싶거든 먹어보게, 맘껏 울것이요. 웃고싶거든 먹어보게, 폐부가 터지도록 웃을 수가 있는 것일세. 거기에 는 거짓이 없어지고 흉허물이 없어지고 세상의 모든 얼기설 기한 그물을 벗어나 초연한 경지에서 놀 수가 있단 말일세.』
한참이나 술 철학 강의를 하고 나더니, 다시
『그러나, 여자는 사귈 것이 아닐세. 영원한 「스핑쓰」라 고 말한 사람도 있지마는, 여자는 못사귈것이야.』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볼 때 역시 영원한 「스핑쓰」로 보는 것은 자네는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야.』
춘우는 옆에서 권하는 술을 사양하다 못해 주는 대로 받아 먹어서 얼근하게 취해 온다.
그러는 동안에 옆에 있던 설성월이가 보이지를 아니하였 다. 술이 들어가서 돌기를 시작하는 대로 춘우의 마음이 누 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자기의 손으로 자기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술을 먹는 것이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하는 말이 술 먹은 사람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요, 옛날부터 오늘에 그렇지 않아 본 일이 없는 진리지 마는, 어찌하여 먹으며 무슨 까닭에 먹은 지도 알지 못하고, 술잔을 입에서 떼지 못하는 것은 그 가운데 사람의 어떠한 약점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기는 하면서, 춘우도 술을 마시고싶은대 로 마시었다.
『이춘우씨 전화 받으셔요.』
뽀이가 들어오더니, 춘우에게 눈짓을 한다. 일동은 모두 그 편을 보았다. 춘우는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는 듯이
『전화? 누군가?』
하고 밖곁으로 나갔다. 그런즉 뽀이가
『이리 오셔요.』
하더니, 다른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누구야?』
하며 필연 다른 방에서 자기를 불러 가느라고 속인 것인가 보다 하고 뽀이를 따라가본즉, 거기는 설성월이가 빈 방에 서 혼자 앉아 있었다.
『오!』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춘우의 다리는 벌써 술기운에 바로 놓여지지를 아니한다.
『참 오래간만야.』
하며 설성월의 손을 잡는 춘우는 설성월의 웃는 낯을 치어 다보며,
『그래 언제 서울 왔어.』
『온지 두서널달 돼요. 선생님 말씀은 제가 모두 듣고 있 었지요. 그래 안녕히 계셨어요.』
『잘 있었지.』
『부인도 안녕하시구요.』
『부인? 하하 잘 있어. 내가 아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담.』
『그것을 몰라요. 모두 다 알아요. 그러나 저러나 아까는 매우 실례를 했어요.』
『무엇을?』
『인사를 여쭙지 않아서요.』
『응 그것야 나도 하지 않았으니까 마찬가지지.』
『그런데, 선생님 퍽 변하셨어요.』
『무엇이 변했어?』
『글쎄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은 할 수 없어요. 어떻 든 이상해지셨어요.』
하며, 다시 춘우를 신기한 듯이 들여다본다.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러는게지.』
『참 웬 약주를 그리 많이 잡수셔요. 저는 오늘야 첨 뵈었 어요.』
『술 먹는 사람이 공연히 먹는 줄 아는 게지.』
『사내 어른이 약주를 너무 아니 잡수셔도 빽빽하고 융통 성이 없어서 안되겠지마는, 너무많이 잡수실 것도 아네요.』
『하지만, 먹게 되면 어디 그런가.』
설성월은 무슨 말을 할듯말듯 입을 버릴듯 하다가, 나중에 결심한 듯이 입을 열면서
『선생님, 부인의 이름이 영숙씨죠?』
춘우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또 전 남편되시는 이는 철수씨고.』
『응, 그것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 아누.』
『자세히 알지요.』
할 때 옆의 방에서
『성월이-』
하고 소리를 질러 부른다. 그러자, 뽀이가 와서 재촉을 한다.
『가만이 있어, 곧 갈터이니.』
춘우는 뽀이를 보내고서
『어디서 보았나.』
그 대답은 하지도 않고,
『또 그 딸이 지금 앓지 않아요.』
『그래.』
『선생님이 지금 약주를 아니 잡숫다가 다시 잡숫는 것이 며, 또는 침울하게 계신 것이며, 전보다 몹시 변한 것을 저 는 그 원인이며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것까지 모조리 알고 있 어요.』
하고 일어서며, 춘우가 다시 그립다는 듯이 어깨에 매달려 보며
『저의 집에 내일 한번 오셔요. 그러면, 선생님을 위해서 말할 것이 있으니까요.』
『무슨 말을?』
『무슨 말이든지요.』
『가지.』
『꼭요.』
동명과 번지를 가르켜 저러고 설성월은 먼저 나아갔다.
춘우는 다시 한번 신기러운 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나서 천 천이 난간으로 배회 하며 생각하였다.
옛날에 놀던 사람을 다시 만나자 옛 회포가 다시 새롭기도 새롭거니와 그렇게 까지 자기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까 지 사랑하리라 하던 설성월이도 오늘에 와서 퍽 많이 범연 하여 진것을 생각하여 보고 또 자기 가슴에 있는 정열이 옛 날의 그것 보다 얼마나 식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때 사 람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간사한 것을 깨달았다.
옛날에는 자기가 없으면 못살겠소 하고 눈물을 흘리던 설 성월이도 오늘에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기생의 생애가 죽 어도 싫다던 사람이 오늘에는 또 다시 웃음을 지어 웃으며 목소리와 단장을 일부러 만들어 남자의 피를 긁으랴 한다.
그것이 억지로 질질 끄을리어 그리하는 것인 것은 누구나 거짓말이 아니라 하겠지마는 자기 혼자만 질질 끄을리어 세 상살이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귀나 영화를 누릴 때로 누리는 사람도 제가 사람의 새끼인 어상에는 인간고(人間苦) 를 떠나지 못하였을 것이며 제아무리 지지하천의 미천한 사 람이라도 사람인 이상에는 또한 그것을 변치 못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기생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은 그 뒤에 사회의 결함이 있으 므로 그 결함을 저주하는 반동으로 나오는 동정이요, 여자 라는 성적(性的)으로 보아서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기디 까지든지 여성이란 여성은 면치 못할 것이므로서 남자 의 반목과 질시가 끊일수가 없을 것이며, 애착과 사모가 있 을 것이다. 다만 이 사회상(社會相)을 떠나서 본점에 있어서 기생도 다른 여성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춘우는 이렇게 종작이 없는 생각을 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술을 먹었다.
춘우는 인력거를 타고서 정신없게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영숙은 춘우를 맞아서 전과 같이 자리에 눕히었다.
춘우가 눈을 떴을 때에는 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 왔을 리가 없는 자기가 집에 와서 누워 있는 것은 기 적이었다.
여러 친구와 지껄이고 떠들며 기생들과 희롱하던 장면이 딱 끊어지고 자기의 아내인 영숙앞에 누워있는 장면이 너무 급하게 이어진 것이 춘우에게는 이상한 감흥을 이르킨다.
그는 이제 자기가 친구들에게 끌려가기 전에 하루 종일 고 민해야 내려온 그 사랑의 부채의 청장을 어찌하였는가? 하 는 생각은 할 때, 그는 자기가 너무 무슨 일에 등한하고 성 의가 없어 보이었다.
자기의 일생을 지배하는 큰일이라도 결심에 결심을 하였던 일이 술과 설성월로 말미암아 계획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하 면 그것은 너무 가벼운 일이다.
그러나 춘우는 어저께 밤에 설성월이가 자기에게 일러준 일을 생각하였다.
지금에 영숙과 자기 사이의 중대한 문제를 청장 하려는 이 때에 자기와 영숙과 또는 철수나 청아의 관계를 자세히 안 다 하며, 또는 거기에 대하여 내게 말하여 준다는 것을 그 대로 지내 쳐버린다는 것은 또 한번 생각하여 볼 일이다.
하루를 연기해서라도 설성월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제 맘먹은 대로 청장을 하리라 비록 기생인 설성월의 입 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내게는 참고가 될는지 알 수 없다고 춘우는 하루를 연기하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때 춘우는 설성월을 찾아갔다. 기생집에 발들여 놓은지가 하도 오래인지라, 그는 서먹서먹하여 얼마간 주저 하였다.
남들이 설성월이를 약하여 성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춘우도
『성월이!』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다시 목소리를 높이하여 불 렀다. 그때야 안에서
『누구야?』
하는 소리가 나며 나오는 사람은 설성월이었다.
『에그 오셨어요.』
춘우는 설성월이 몹시 난처해하는 눈치를 보고서
『손님이 계시우?』
하며 설성월의 말을 미리 해주었다.
『예.』
『그러면……』
하고 한참이나 춘우는 말이 없이 있다가,
『어떻게 할까?』
『글세요.』
춘우는 무엇을 깨닫듯이
『옳지, 내가 부를 터이니 기다려줘.』
『예, 그러셔요. 오래간만에 모처럼 오신걸 들어오시지도 못해서 미안합니다.』
『천만에.』
춘우는 요리 집에 앉아 인력거를 보내었다. 얼마 아니하여 설성월은 왔다.
자리가 정한 후로 춘우는 설성월의 말문을 열리게 하기 위 하여 그 동안에 어떻게 지냈으며 서울로 다시 오게된 사정 이야기를 물었다. 설성월은 자못 감구의 회포가 있는 표정 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나의 사정을 아나.』
춘우는 혼자 맥주를 들며 물었다. 설성월은 고개를 잠깐 숙이고 상긋 웃어서 자기가 그만한 것을 아는 것이 자랑스 러운 듯이 입을 연다.
『그것을 몰라요. 선생님이 지금에 어떻게 괴로우신 마음 을 가지고 있는 것도 저는 아는데요.』
『무슨 괴로운 맘을 나는 조금도 괴롭지 않아. 언제든지 유쾌한 마음으로.』
『듣기 싫어요. 그렇게 거짓말을 하신다고 제가 속을 줄 아십니까.』
춘우는 속으로는 그 말을 인정하며 겉으로는 억지로 웃음 을 나타내면서,
『내가 속이기는 무엇을 속인단 말이야. 그 속지 않는 이 야기를 좀 들려 주어.』
『속지 않는 이야기요. 저는 그 말씀을 선생님께 말씀하기 는 싫어요. 그것이 조금도 선생님께서는 이롭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롭거나 해롭거나 그것은 성월이가 내게 친절함을 보이 는 것이니까, 무슨 이야기든지 해주어야할 것이 아닌가. 내 게 이롭다고 이야기를 하고, 이롭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여 주지 않는다 하면 그것은 의리 있는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 이니까.』
『의리요? 제가 무슨 의리가 있겠읍니까. 의리가 비록 있 다 하드라도 그 의리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들이니까.』
하고 말이 없다가,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로
『선생님!』
하고 춘우를 부르더니,
『아까 저의 집에 있던 이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몰라.』
『그이가 바로 청아의 아버지얘요.』
이 말을 듣고 춘우는 자기도 모르게
『응?』
소리를 냈다.
『그 사람이 철수야.』
춘우는 당장에 철수가 옆에 있는 것처럼 주먹을 쥐고 벌렸다.
『아 나의 행복이라면 어디서 어디까지 깨뜨려 부수려하는 악마다.』
이럴 때 옆에 방에 어떠한 손님이 들어오더니, 춘우와 설 성월의 이야기를 남겨놓지 않고 듣는 사람이 있었다. 설성 월과 춘우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노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그러나, 김철수 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가지고 노하실 것은 없을 것 같읍 니다. 우리 집에는 누구든지 올 수가 있는 것이 아네요. 그 렇다고 오는 이를 가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저의 직분이니 까요.』
설성월은 춘우에게 철수의 말을 한것이 여러가지로 자기와 춘우 사이의 관계를 소원히 하게되는 동기나 되지 아니할까 하여 철수와 자기 관계를 춘우가 의심하거나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극력으로 변명을 하였다.
『철수가 성월의 집에 다닌지는 얼마나 되나?』
『얼마 되지 아니해요. 한 서너달 되는지요.』
『그러면, 성월이도 철수를 생각하는 게지?』
『안요.』
고개를 내흔들며
『그저 여러번 놀았을 뿐에요.』
춘우는 얼굴에 엷게 올라온 술기운에 조금 흥분이 되어
『그야말로 나를 속이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나도 쉽게 속 으려하는 사람은 아니야!』
하고 조소하듯이 웃음을 웃었다.
『그거 참 기막히네. 그것야 제가 변명을 한다고 곧이들이 시지 않으시면 곧이듣지 않으실 터이오. 변명하지 않드라도 저의 양심은 있는 것이니까요.』
춘우와 성월의 이야기가 잠깐 머리를 딴데로 돌리었다가, 춘우가
『그러나 저러나 어저께 이야기하여 주마 한 것을 이야기 해 주어야지.』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머리를 바로잡게 되었다.
『어저께 하겠다는 말씀요?』
『응.』
『그것은 말씀을 해드릴 터인데요.』
『그래.』
『저의 요구 조건도 하나 들어주신다 하면 말씀을 하여 드 리지요.』
『무슨 요구 조건?』
설성월은 잠깐 웃음을 띠우더니 부끄러운 듯이 얼굴빛이 불그레하여진다.
『무슨 요구든지 제 요구면 언제든지 들어주시지요.』
『내 몸으로나 내 마음으로 할 수만 있으면.』
『그러면, 다음에 다른 말씀을 하시지 못합니다.』
『그래, 한입으로 두말할가.』
『그러면, 이야기하지요. 선생님의 부인이 지금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은 선생님이 모르실것입니다. 영숙씨 만큼 선생 님을 사랑하는 이가 없어요. 선생님이 지금 영숙씨를 의심 하는 것도 나는 알아요. 그러나, 그 의심하시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요. 그렇지만, 영숙씨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는 춘우는 속으로 비웃었다. 「네가 무엇을 안 다고,」그러나, 겉으로는 웃음을 지우면서,
『그것은 무슨 증거로?』
『증거요? 증거는 얼마든지 있지요. 영숙씨가 선생님에게 맹서까지 하고서 철수씨에게는 가지 않겠다 하였지요.』
『그래.』
『그러고도 영숙씨는 철수씨에게 아니 갈 수가 없게되어 선생님의 눈을 기이고 다닙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람. 한 번 내게 맹세를 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하여도 그것이 잘한 일이 못 될 터인데, 두 번씩.』
『글쎄요. 얼핏 생각하면 그래요. 그렇지만, 만일 영숙씨가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렇게 선생님을 속일 리가 없지요. 가야 하기는 가야 할터인데, 선생님이 그것을 아신 다 하면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아마 좀 좋지 못하시겠지요.』
『그것야 그렇겠지.』
『또 선생님이 군색하실 때에 영숙씨가 철수씨와 사실 때 에 장만하였던 패물을 팔든지 그렇지 않으면 철수씨의 주머 니서 나온 금전을 갖다 드린다 하면 그것을 선생님이 받으 시겠습니까?』
『물론 받지 않겠지.』
『그러니까 말얘요. 영숙씨가 선생님을 속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얘요.』
춘우는 설성월에게 이 말을 듣고서 비로소 지나간 일을 한 가닥 두가닥씩 풀 수가 있었다. 그와 같은 말을 듣고서 춘 우는 영숙의 일동일정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었다.
문을 닫고 다니는 것이며, 돈을 변통하여가지고 와서 자기 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며, 영숙의 얼굴에 전에 없던 근 심 빛이 있는 것을 춘우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만일 설성월이 말이 참말이라 하면, 나는 도리어 영숙에 게 죄를 지었으며, 그만큼 영숙을 알아주지 못한 사람이다.』
하고 속으로 뉘우치는 생각과 또는 감사한 생각이 핏속에 스미어드는 듯이 느끼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설성월은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선생님이 영숙씨를 사랑하시는 것도 제가 알고 영숙씨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영 숙씨의 장래가 반드시 불행에서 끝날 줄을 저는 알아요. 선 생님이나 영숙씨의 사랑은 반드시 영구히 계속되지 못할 것 입니다.』
춘우는 이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서운함을 느끼었다.
『왜?』
『왜요? 그것은 청아라는 아이 때문이지요. 선생님은 사내 양반이시니까 자세히 모르실는지 알 수가 없겠지마는, 여자 는 자식을 내버리고 그 남편을 따라가는 일이 없다고 해도 가합니다. 만일 자식을 내버리고 애인을 따라 간 여자가 있 다 하면 그것은 음부거나 사랑이 아니라 색정이겠죠.』
『그러면, 자식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 머니가 자식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지.』
『어느 편이든지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청아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면 고만이지.』
『글세 딱한 말씀도 하시네. 청아를 그애 아버지가 내줄지 말이지요. 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영숙을 잊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들려고 별별 수단을 다 쓰는데요.』
『그것은 내 생각 같아서는 영숙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원수를 갚으랴 하는 것이겠지. 만일 참으로 영숙 을 사랑한다 하면 얼핏 청아를 내놓으면 얼마나 영숙이가 즐거워할 것이냐 말야.』
『그것은 선생님이 바꾸어 생각을 하여 보셔요. 선생님도 그런 일을 당하시면, 아마 그대로 계시지를 않으실 터이지요.』
춘우는 속마음으로 얼마간 설성월의 말을 옳다고 생각한 점이 있었다.
『자, 술 한잔 먹지 않을 터이야.』
『술요? 선생님이 주시는 술이면 한잔만 먹지요.』
얼마간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설성월은 핏빛 같은 포도주를 따라서 한모금 마시고 입맛 을 다시려고 입술을 벌리었다가 다칠 때 옥 같은 이에는 선 지 같은 포도주가 묻었다 사라진다. 술기운이 어린 눈으로 설성월을 보는 춘우의 눈에는 옛적에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던 설성월이의 고아(高雅)한 듯하고 순진한 듯한 그림 자는 어느덧 사라지고 깜직하고도 그 미력에 끌려 들어갈듯 한 빛이 보였다.
마치 여자마술사(女子魔術師)를 대한 듯이 뻔히 그런 줄 알 면서도 그리로 끌려가지 않을수 없게 되는 듯하였다.
설성월은 속눈썹이 긴 까만 눈동자를 수정 같이 번쩍이며 입을 꼭 다문채 한참이나 뚫어지게 춘우를 보더니,
『선생님! 선생님의 요구하시는 대로 제가 할것은 다 해드 렸으니까, 저의 요구도 선생님이 들어주셔야죠.』
하며 목마른 사람처럼 포도주를 마시었다.
『참 무슨 요구인데, 들을 만하면 들어주지.』
『들을만 하면 들어주셔요?』
『그래.』
『그러면, 들어주실만 하지 않으면 못 들어주시겠다는 말 이지요?』
『그것야 다시 말할 것도 없겠지.』
『첫째 선생님은 영숙씨를 단념하세요. 그러신다 하면, 또 제가 말씀할 것이 있으니까요.』
『그것은 지금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니까 천천 히 대답하지.』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선생님이 저를 고약하고 또는 몰 인정한 사람이라 하실는지 모르겠지마는, 선생님을 위하여 저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오늘 이 자리에서 단념 을 하시지 않는다 하면 도리어 선생님이 후회하시게 될 것 입니다. 영숙씨는 벌써 철수씨에게로 돌아간지 오래니까요.』
춘우의 마음은 에이는 듯이 아팠으나, 그러한 내색은 조금 도 밖으로 내보이지 아니하며,
『영숙이가 철수에게로 돌아갔거나 그것은 그 당자의 할 일이요, 내가 단념을 하거나 말거나 그것은 또 내가 할 일 이니까……』
설성월은 허리가 부러질 듯이 웃으면서,
『사내양반들은 저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야. 그래도 잊지를 못하셔서 입으로 말씀은 저렇게 하시지만, 속으로는 영숙씨나 철수씨를……』
『아니.』
춘우는 설성월의 말을 중단시키어,
『조금도 그 사람들을 원망을 하거나 또는 원수로 알지는 않아. 영숙에게나 철수에게 운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있 으니까.』
춘우의 말에는 애조가 흘렀다.
설성월은 이 말을 듣더니, 반쯤은 그러하다고 춘우의 말을 긍정(肯定)하는 듯도 하고, 또 반쯤은 춘우의 가슴속을 들여 다보아, 그 괴로운 것을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감추려하 는 것을 비웃는 듯이 코웃음 비슷한 웃음을 웃다가,
『그럴가요? 그러는지도 모르지요.』
하며 춘우를 다시 뚫어지도록 들여다보더니,
『그런데요.』
하고 다시 말을 이으며 분결같은 손으로 타는 듯이 새빨간 능금을 들었다 나타났다 고양이가 방울 작난하듯하다가, 다 시 그것을 놓고
『선생님! 선생님이 옛날의 설성월이를 잊어버리신지가 오 래시지요?』
하며 의미가 깊은 눈초리로 본다. 춘우는 그의 표정으로서 성월의 맘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때의 춘우는 무엇이라 고 말할 수 없는 아픈 감정이 설성월의 말을 통하여 얼마간 녹아 버리는 듯함을 느끼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직까지도 옛날의 성월을 생각하 는 그 마음을 고대로 가지고 있는데.』
하는 말을 춘우는 자기가 자기의 입을 의심할 만큼 옛날의 순진한 마음이 없어진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선생님도 거짓말을 하실 줄 아시게 되었습니다 그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해.』
『정말로 저를 옛날과 똑같이 생각하여 주셔요?』
『그럼.』
『그럼요? 저도 그 동안에 선생님보다 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 까닭에 남이 거짓말하는 것인지 아 닌지를 잘 분간할 수가 있게 되었답니다.』
『그것야 그럴는지 모르지마는, 내가 거짓말한 증거가 무 엇야?』
『하하 증거요? 증거야 지금 당장의 선생님 가슴에 손을 대어 보십시오. 그 심장이 얼마나 높이 뛰나, 영숙씨 때문에 고민을 하신다는 것은 즉 저를 잊어버리셨다는 증거니까요.』
『그것이 어째서?』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어요? 영숙씨와 꿈 같은 사랑을 속살거리실 때나 선생님의 팔위에 영숙씨를 끼어 안으셨을 때 아마 설성월을 한번도 생각이나 해보신 때는 없으셨을 터이지요.』
춘우는 말이 없었다. 성월은 어느 틈에 춘우 곁 가까이 가 앉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춘우의 귀를 간지렀다. 그의 입 향 기가 춘우의 코에 미치었다. 검다못해 푸른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모두 빨아들일 듯이 춘우의 얼굴 위에서 굴러다니는 듯 하였다. 그의 연지 바른 입이 가까이만가도 불같이 뜨거 워 춘우의 피를 태울듯하였다.
부드러운 손이 춘우의 다리 위에서 산 뱅어처럼 꼼지락거 릴 때 춘우는 무엇에 홀리는 줄 모르게 홀리었다. 춘우의 팔이 설성월의 허리를 감고 가슴과 가슴이 닿고 뺨과 뺨이 문질러졌다. 그러다가는, 입과 입이 다았다 떨어질 때 그들 은 서로 부끄러웠다. 이것이 설성월과 춘우에게는 처음 있 는 일이다. 옛날에 두 사람은 이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사랑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반드시 유탕기분에 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경계하기는 두 사람이 똑 마찬가지지마는, 또는 정과 정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옛날과 다른 것이 그들의 가슴을 둘 이 서로 헤치는 것이 너무 쉽고 또는 너무 빨라 어느 것이 진정인지 그것을 두 사람까지도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성월은 지금에 춘우의 약점을 안다. 춘우의 속이 몹시 원 망과 분노와 또는 비애로 찬 것을 안다. 더구나 세상에 혼 자 선것 같이 쓸쓸함을 안다. 이것을 속히 알아챈 성월은 춘우의 마음을 얼핏 사로잡기 쉬운 것을 안다.
『선생님! 제가 아까 단념하시란 말씀을 여쭌것이 몹시 잘 못된 말이지요?』
춘우는 다시 단정한 태도로 말을 끄내었다.
『천만에 그 말에도 일리가 있겠지.』
『글쎄요. 그렇지만 제 생각 같아서는 선생님이 영숙씨를 단념하지 않으시고 만일 고집을 세우신다 하시면, 네 사람 이 불행해 질터이고요. 그렇지 않으시면 한 사람이 불행해 지겠죠……아니 그렇지도 않죠. 도리어 다섯 사람이 행복스 러워질는지도 몰라요.』
『다섯 사람이라니? 또 한 사람은 누구야?』
『그것은 생각해 보셔요. 그런 사람이 저기 어디에서 선생 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까요.』
춘우는 알아챘으나, 그를 일부러 모르는 체하였다.
『그렇게 모르신다 하면 차차 제가 아르켜 드릴 때가 있겠 지요.』
「인생은 영원한 단념이다」이 말이 새 말이 아니지마는, 춘우에게는 다시 진리를 말하는 것 같다.
『단념! 단념!』
단념이라는 것은 하려다가 할 수 없으니까, 고만 두고 내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목숨을 단념한다고는 할지라도, 이것을 단념 할 수가 있을까?』
춘우는 그대로 그 자리에 엎드리어 울었다.
『안돼! 안돼! 영원히 단념은 못할 것이다.』
춘우는 고개를 비벼가며 울었다.
『내가 한 사람이 행복스럽기 위하여 세상 사람이 다 죽는 다 하더라도 나는 단념을 할 수 없다.』
『아 안돼! 누가 어떠한 말을 하든지 나는 영숙을 놓을 수 는 없다.』
하며 춘우는 다시 일어서서
『성월! 너와 나와는 다시 만나지 말자. 오늘 내가 네게 한 것도 내가 영숙에게 대하여서는 일종의 부정(不貞)이다. 죄 악이다. 자 얼핏 헤어지자.』
춘우는 시뻘겋게 피가 오른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설성 월을 돌아다보며,
『잘 가거라. 서로 깨끗하게 잊어버리자. 다소 만나지 말자.』
하고 나오려하매 설성월은 생긋 웃으며, 춘우의 소매를 잡 고 귀에다 입을 대고 나지막한 소리로
『그렇지만 내일 이맘때가 되기 전에 만나뵙게 되겠지요.』
하고는 자기도 나왔다. 설성월이 춘우를 보내고 막 돌아서 려할 제, 뒤에서 탁 달려드는 사람하나가
『재미가 좋구려. 두분이.』
놀려먹는 어조로 말을 하는 사람은 철수였다. 설성월은 무 슨 원수나 만난 듯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앗 언제 오셨어요?』
하고 달려들려하며,
『나 온 것은 알아 무엇하료?』
하고 역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춘우는 혼자 경성 시가를 헤메였다. 꿈 같은 생각이 가슴 을 눌러서 느긋한 감정이 안개같이 전신을 싸고 돌뿐이다.
달아나는 어머니의 차맛자락에 매달렸다가, 뿌리침을 당한 것 같이 그는 적적함과 무서움과 외로움이 있었다. 벌써 서 로 갖다가 붙이려하나, 붙일수 없이 깨어진 것 같이 영숙과 자기 사이에는 파탄(破綻)이 생긴것을 알 때에 그는 광야에 홀로 선것 같았다.
그에게 다시 불행과 불운이 닥쳐 올 것을 깨달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에서 끓어 올라와서 눈물이 뜨겁 게 두 눈에서 솟을뿐이다.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었다. 가 는 곳 오는 곳마다 영숙과 자기의 옛날 사랑을 이야기하는 기억의 흔적이 아닌 곳이 없으며 행복의 기념이 아닌 것이 없었다. 옛날에 길거리를 거닐 때에는 반드시 영숙이 자기 옆에 있어 희망과 즐거움이 가득 찬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 으나 오늘의 자기는 혼자 넓은 길거리를 외롭게 걸어간다.
그는 나침반(羅針盤)을 꺾어뜨린 배 모양으로 지향없이 이 리저리 돌아다닐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옛날의 어머니가 자기를 강보에 싸서 들고 푸지한 것을 두발로 장단맞춰 밟 으시며,
『자장 자장.』
하시던 어머니가 보이더니, 또 다시 자기의 손목에 이끌리 어 길가를 헤매이는 인우가 보인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자 기와 자기 동생의 우애는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깊었으며 아내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의 타락을 깊은 구렁에서 신음하는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계셨드면?』
이러한 소리로 부르짖은 것이 하루에도 몇 번인지 알지 못 하였었으나, 오늘 같이 어머니 없는 서름을 느끼어 본적이 드물었다.
모든 불행의 원인(遠因)을 찾아 올라가서 그것이 귀착되는 곳은 어머니 없는 그곳이다. 춘우는 불현듯이 인우가 보고 싶었다. 혼자 남아 있는 인우를 생각할 때 내버리고 온 자 기가 너무 무정한 듯하였다. 데려오려하나 주지 않는 아버 지의 심사도 책망할 수도 없거니와, 혼자 내버려둔 자기가 부끄러울 만큼 죄악같았다.
『그렇다. 오래간만에 인우나 만나보자.』
그는 과자가게에 가서 과자를 샀다. 그리고 다시 서대문을 향하여 갔다.
『아버지가 보시면 꾸중을 하시겠지 문에서 내쫓으시겠지.』
『그렇지만 간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간다. 탕자가 돌아 오는 것을 맞는 부자집 아버지 같이 너를 맞아주지는 않을 지라도, 나는 인우를 위하여 가볼 것이다.』
춘우가 집에 들어설 때에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반가웠다.
마당에서 마루 끝으로 올라설 때에는 아버지가 마루까지 뛰 어나왔다. 인우가 지다가 울면서 반가워 벗은 채 뛰어나왔다.
『춘우냐?』
『언니!』
『예. 오냐.』
단 네마디가 세 사람을 울릴만큼 감격이 있었다.
춘우의 아버지의 입끝과 코가 씰룩씰룩하고 떨리도록 감격 이 복바쳐서 말을 못하고 그저 울 듯 웃을까 하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니? 너도 집엥올 날이 있구나.』
『언니 인제 가지 않소?』
인우는 과자를 먹으며 춘우를 어머니 어루만지듯 어디를 어루만져야 좋을지 몰라서 팔다리를 더듬기도 하고, 고개를 대고 비벼보기도 하면서 좋아하였다.
『그래 그래.』
춘우는 무엇이라 대답 할지 몰라서, 그저 그래 그래 할 뿐 이었다.
『인제 언니가 왔으니까, 나는 퍽 좋아, 당최 가지 말우, 나는 퍽 보고 싶었어.』
『그 동안에 창가 많이 했니?』
『창가? 누구허고 해? 같이할 사람이 있어야지. 언니가 간 뒤에는 같이할 사람이 없어 못했어.』
인우는 몹시 수척하여졌다. 보지 않았드면 좋으리 만큼 여 위고 못되었다. 그것도 춘우에게 어머니 없는 탓으로 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나허구 갑시다.』
그는 애원하듯이 춘우의 팔에 실리며 말을 하였다.
『같이 가지. 어디든지 데려다주지.』
춘우는 울고 싶기만한 감정으로 그 말을 하였다. 인우는 춘우를 보더니, 꺼칠꺼칠한 수염을 만져 보면서,
『이게 뭐요. 수염 좀 깎구. 전에는 아주 예쁘더니, 흉해.』
춘우도 아는 바지만, 인우도 자기의 얼굴이 못된 것을 알 아주고 동정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언지!』
『응!』
인우는 무슨 말을 할 듯 하더니,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왜 그래. 말을 해라.』
아까까지는 절대의 권위자는 아버지였으나, 지금은 자기의 후원자를 얻은 인우는
『저.』
하고 다시 입을 답치면서
『아버지께 또 꾸중들게.』
아버지는 눈을 흘겨보며 자기의 죄악을 폭로시키려는 인우 를 무섭게 흘겨본다.
『말해라. 내가 들어보아서 꾸중 안 듣게 해주께.』
춘우는 인우를 끼어안고 타일렀다. 인우는 그때 말 아니할 수 없는 듯이
『언니가 지난번 겨울에 날더러 꽃이 피면 어머니가 오신 다 하더니, 어디 어머니가 오시우? 벌써 꽃이 다 떨어졌는데』
춘우는 인우를 끼어안고 그대로 울고 싶었다. 자기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인우의 어린 가슴을 태우게 하였는가?
『어머니 그렇게 보고 싶으냐?』
『보고 싶고 말고, 나는 어머니가 얼핏 와서 다른 애들처 럼 귀애해주었으면 좋겠어.』
『인제 네가 나만해지면 오시지.』
『또 더 있어야 해?』
『그래.』